▲청춘의 사신/서경식 지음·김석희 옮김/창작과비평사 발행·1만원20세기의 전반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량 살육이 벌어진 비극과 반문명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렇기에 온 몸으로 고난을 받아들이면서 가슴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저항의 예술혼을 불태운 화가들의 시대이기도 하다. 일본 도쿄게이자이(東京經濟)대 현대법학부 서경식(51) 교수가 지난해 일본에서 펴낸 미술 에세이집 '청춘의 사신(死神)'은 치열한 창조정신으로 20세기의 폭력을 고발한 화가들과 그들의 예술세계를 31편의 글에 차분하게 펼쳐냈다.
독일 화가 오토 딕스의 '일곱가지 대죄'(1933년작)에 대한 글.그림에는 '음탕''오만''분노'등을 상징하는 인물이 한꺼번에 등장하는데 시선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은 한 가운데 있는 '죽음의 신'이다. 길다란 낫을 들고 있는 '죽음의 신'은 사실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갈고리 모양의 십자)를 변형한 것이었다.
저자는 "딕스가 나치의 신경을 건드리는 도전장을 던졌다"고 풀이한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 딕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닥친다. 나치 치하에서 작품 발표를 제대로 못했고 생활도 무척 궁핍해졌다. 급기야 쉰 넷에 독일군에 강제 소집돼 전선으로 내몰렸고 연합군의 포로로 붙잡히기에 이른다.
독일 화가 펠릭스 누스바움의 '유대인 증명서을 들고 있는 자화상'(1943년작)에는 막다른 구석에 몰린 절박한 한 남자가 그려져 있다. 펠릭스 자신이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의 추적을 받던 그는 은신처에서 발각돼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한다. 그런 사연을 알고 그림을 다시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저자는 그림 속 남자가 유대인 증명서를 내보임으로써 그림을 보는 모든 이들을 밀고자의 위치로 내몰고 있다고 말한다.
역시 독일 화가인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1903년작)도 저자에게는 충격적인 작품이다. 그림 속 아이는 콜비츠의 여섯살 난 아들이 모델이었다. 아들은 11년 뒤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군으로 지원, 참전했으나 전사한다. 화가는 자식을 잃을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그림을 그렸던 건 아닐까. 콜비츠도 나치로부터 억압을 받고 작품 발표 기회도 빼앗긴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살까지 생각하다 1945년 4월22일 77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8일 뒤 히틀러가 자살하고 다시 일주일 뒤 나치가 항복한 것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것이다.
미국서 주로 활동한 벤 샨의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1931~32년작)에는 차별과 빈곤, 사상의 자유에 대한 화가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림 속 관에는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 온 사코와 반제티가 누워 있다. 이들은 1920년 4월14일 메사추세츠의 제화공장 회계담당 부주임과 경비원이 총에 맞아 죽자 용의자로 체포된다. 둘 다 무정부주의자였기 때문에 재판은 범죄사실보다 이들의 사상을 더욱 문제삼았다. 이들은 국내외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1927년 전기의자에 앉아 죽음을 맞는다. 그로부터 50년 뒤, 메사추세츠 주지사는 이들의 무죄를 공식 확인하는 성명을 냈다.
책은 이밖에 노다 히데오(野田英夫), 하세와 도시유키(長谷川利行)등 일본 군국주의 체제속에서 힘들게 살다간 화가들의 그림과 사연도 소개한다.
'청춘의 사신'의 매력은 이처럼 단순한 그림 감상 길잡이 차원을 넘어, 시대의 아픔에 대한 통찰과, 심미안 그리고 작품에 숨어있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있다. 유려한 문체는 책 읽기를 한결 수월하게 한다. 저자는 "뛰어난 작품을 낳은 예술가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든 반드시 감동적이고 시대와 인생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나 깊은 사색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고 말한다.
일본 교토(京都)에서 한국인 2세로 태어난 저자는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1년 승,준식 등 두 형이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수감되면서 그 역시 근 20년간 힘든 세월을 보냈다.
두 형이 옥중에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당시 저자는 '지하실에 처넣어진 듯한 기분'을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유럽으로 떠났으며 거기서 만난 예술은 '숨막히는 지하실에 뚫린 작은 창문'이었다고 서문에서 고백하고 있다. 그는 유럽의 미술관을 순례하며 쓴 에세이를 모아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펴내기도 했다.
박광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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