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민족은 제각기 고유의 민족의식을 갖고 있다. 그 중에서도 중화사상(中華思想)은 중국문명과 함께 싹터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전개 되었고, 오늘날에도 중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중화사상이란 한마디로 중국민족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말한다.
3,000여년 전 주(周)나라 때 시작된 중화사상은 중국이 주변의 이민족에 비해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고 주변의 동서남북에는 오랑캐들, 즉 사이(四夷)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동쪽에 있는 우리나라를 동이(東夷)라고 한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수·당 시대처럼 중국이 이민족에 대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을 때 중화사상은 그들의 문화로 열등한 이민족을 덕화(德化)한다는 포용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송나라 때처럼 주변의 이민족들이 강성하여 요, 서하, 금 등이 중국을 침입해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면 화(華)와 이(夷)를 구별하는 배타적인 화이사상(華夷思想)으로 나타나곤 했다.
송대 사대부들이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이나 개인적인 글에는 이민족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내용이 많다.
그들은 한족 이외의 민족들, 즉 ‘오랑캐’들은 개나 돼지, 승냥이, 여우, 전갈 등과 같이 표독하고 야비하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중화사상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그들 스스로 중화문화의 계승을 표명하고 한족과 동일시하려는 정책을 펴나갔다.
그리고 특유의 중화사상과 자급자족적 경제체제에 힘입어 전통적인 조공관계를 고집했다.
아편전쟁이 터지기 전 대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하려는 영국사절이 도착했을 때 황제에게 표해야 하는 ‘삼궤구고두(三九叩頭)’의 예가 문제가 되었다.
즉 세 번 무릎을 꿇고 조아릴 때마다 다시 세 번씩 절해야 하는 예를 영국이 거부하여 협상 자체가 결렬되고 말았다.
중화사상은 이민족을 지배하는 방법 중의 하나인 기미정책(羈縻政策)에도 나타난다.
이는 주변의 정복 지역을 직접 통치하지 않고 해당 지역의 유력자를 포섭하여 중국의 관작(官爵)을 수여하고 중국의 지배에 반항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중화사상과 기미정책은 오늘날 중국 민족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청조를 타도하기 위해 쑨원(孫文)이 주장한 삼민주의(三民主義)의 민족정책은 처음에는 ‘멸만흥한(滅滿興漢)’이 중심이었고 청조가 망하자 ‘오족공화(五族共和)’로 바꾸어 한족을 비롯한 만(滿)·몽(蒙) ·회(回)·장(藏)족이 중국을 구성하는 민족으로 동등하게 인정하였다.
이 정책은 중화인민공화국에도 계승되어 소수 민족에게 자치구·현을 만들어 민족 고유성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또한 인구정책에서도 한 세대에 한 자녀만 낳아야 하는 원칙을 완화시켜 그들에게는 두 자녀 이상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자치구·현에 한족을 이주시켜서 한족화하고 중앙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막고 있다. 1950년에 강제 합병한 티베트의 독립을 용인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우리나라의 4강 진출을 유독 중국 언론만 매우 못마땅하게 보았다. 1승은커녕 한 골도 넣지 못한 중국에게 한국의 승리는 마음을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다.
또 심판의 판정을 문제 삼아 우리나라가 중국보다 특별히 잘 한 것도 없었다고 트집을 잡아야 그들의 패배를 합리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16강 진출로 만족했던 일본이 우리나라를 응원한 것은 일종의 가진 자의 여유라고 본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과 국력신장으로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보는 눈이 달라졌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중국인들의 뿌리깊은 중화사상까지 불식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배타적인 우월감이나 타민족을 무시하는 국가가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결코 국제사회의 건전한 일원이 될 수 없음을 중국은 알아야 한다.
/박지훈 경기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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