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4강 신화를 계기로 태극전사들의 유럽진출 움직임이 활발한 듯 하다. 유럽리그에서 뛰어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무척 반가운 일이다. 많은 선수들이 빅리그로 뻗어나가 세계수준의 기량을 발휘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내가 유럽에 진출했던 때와 지금은 상황이 한참 다르다. 나는 해군에서 제대한 지 두달만인 1980년 8월 네덜란드 PSV아인트호벤과 계약을 맺었다. 최근 거스 히딩크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팀으로 스물여섯살 때의 일이다.
사실 나는 제대 1년전인 79년 여름 독일과 네덜란드 프로리그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처럼 에이전트는 없었지만 현지 교민들이 자기 일처럼 나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내심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나는 그때부터 유럽진출을 꿈꾸며 팀 분석과 영어공부 등 나름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독일의 보쿰과 아인트호벤에서 잇달아 테스트에 합격한 뒤 조건이 나은 아인트호벤을 택했다. 당시엔 우리나라에 프로팀이 없어 소속 구단과의 이적료 협상 등을 놓고 골치를 앓을 이유도 없었다.
20년이 넘은 옛날 얘기를 들춰낸 건 요즘 후배들이 너무 조급해 한다는 인상이 들기 때문이다. “무조건 프리미어리거가 되고 싶다”거나 “반드시 올시즌 유럽에 진출하겠다”는 얘기가 들릴 때마다 나는 급한 길도 돌아가라는 조언을 해주고 싶다.
프로세계에서는 실력과 돈이 모든 걸 말해주지만 협상과정도 무시할 수 없다. 냉정하게 말해 실력이 뛰어나면 좋은 대우를 요구하고 팀을 고를 수도 있다. 반면 애원하는 듯한 인상을 주면 협상에서 손해를 보는 건 당연하다.
우리 선수들은 월드컵 무대를 통해 이미 빅리그에서 뛸 수 있다는 기본적 평가는 받았다고 본다. 그리고 기회가 닿는 한 유럽 구단의 입단 테스트에 응해 당당히 제실력을 과시하라고 권하고 싶다.
돈과 명예를 찾아 나서는 길을 막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과연 유럽진출을 위해 얼마만큼 노력과 준비를 했는지, 테스트에 합격한 뒤 당당한 조건을 내세우며 계약할 수 있는 지 곰곰이 따져보길 바란다.
/허정무 전 대표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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