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프랑스의 정치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프랑스 시민혁명이 싹틔운 자유ㆍ 평등ㆍ 박애의 민주적 이상을 프랑스보다 미국이 먼저 꽃 피웠다고 칭송했다.구대륙 봉건 질서에 염증이 난 노르망디 귀족 출신 토크빌의 미국 인식은 오랜 세월 수많은 미국 밖 지식인들에게 그대로 성경 말씀이었다.
광대한 국토와 부(富)의 원천을 가진 나라가 민주적 질서까지 갖췄으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기회의 나라로 믿는데 주저할 바 없었다.
토크빌 이후 160 여년이 흐르는 사이, 미국의 위상과 이미지도 크게 바뀌었다.
수평선너머 떠오르던 신대륙은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유일 초강대국이 됐고, 미국적 이념과 가치가 지구촌 구석까지 침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변화는 오늘 날 토크빌처럼 미국을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로 믿는 이는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 곳이 기회의 나라일 수 있지만, 자유와 정의가 도도하게 흐르는 약속의 땅은 아니라는 인식이 어느 시대보다 널리 퍼져있다.
그 ‘미국의 배반’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지난 주 있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최근 창설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소추 대상에서 평화유지활동에 파견된 미군만은 예외적으로 1년 동안 제외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사건이냐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ICC가 전쟁범죄와 집단학살 등 반인류적 범죄를 유엔의 권위아래 독립 법원에서 처벌하자는 최초의 국제적 합의에 따른 것임을 고려하면, 유독 미국에 면책특권을 준 것은 역사에 기록될 스캔들이나 다름없다.
‘1년 면책’은 다른 이사국의 체면을 고려한 타협일 뿐 계속 연장될 것이란 예상이고 보면 한층 그렇다.
안보리 면책결의는 미국이 보스니아 평화유지군 철수를 위협하며 다른 이사국을 윽박지른 결과라는 점에서 미국이 자랑 삼던 자유와 평등 이념을 스스로 짓밟은 사건으로 지적된다.
2차대전 뒤의 뉘른베르크ㆍ도쿄 전범재판을 비롯해 반인류적 범죄를 독자적 권위로 처벌하고 응징한 미국이 자신은 초월적 존재로 행세하는 것은 지난 날 칭송받던 미국적 가치에 대한 배반이라는 것이다.
9ㆍ11 테러 뒤 미국 사회 일각에서 일었던 오만한 유일주의 대외 행보에 대한 자성론은 결국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셈이다.
암묵적으로 미국 편을 든 영국의 전열 이탈로 미국을 끝내 견제하지 못한 유럽은 이를 ‘오만의 승리’ 또는 ‘승자 독식’이라고 개탄한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은 오만함 때문에 어느 때보다 고립되고 있으며, 이성과 정의를 좇는 새로운 국제 질서를 위한 도덕성 경쟁을 재촉할 것으로 예상한다.
헛된 자위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오만과 고립 속에 영원히 번성할 나라나 개인은 없다.
그런 조짐은 이미 뚜렷하다. ‘미국의 배반’은 미국적 자본주의의 위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다. 지난 10여 년 미국과 세계를 지배한 미국식 금융경제, 증시 자본주의가 잇단 대기업 도산과 회계부정 사건으로 뿌리부터 흔들리는 상황은 도덕성 없는 로맨스의 종말에 비유된다.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저버린 채, 규제없는 탐욕과 성공 신화를 다투는 타락한 카지노 자본주의에 몰두한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정의와 계층간 평화 따위는 무시한 채 오로지 힘세고 영악한 승리자를 찬양하는 정글의 논리에 매달린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지적이다.
우리 사회가 특히 숭상하는 미국 신화가 붕괴하고 있는 지는 지켜 볼 일이다.
다만 일찍이 그 약속의 땅에 온통 경도된 듯 어린 아들의 국적마저 바꾼 총리 지명자가 뒤늦게 곤욕을 치르며 자책하는 모습에서 역시 ‘미국의 배반’을 본다.
타락한 미국적 가치를 열심히 좇아 성공의 절정에 오른 순간 들이닥친 그 격렬한 배반을 달리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강병태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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