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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이야기](13)경주 안압지/연못 규모·설계 경이로워 신라인들의 호사 엿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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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이야기](13)경주 안압지/연못 규모·설계 경이로워 신라인들의 호사 엿보게

입력
2002.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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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를 찾는 사람들이 꼭 들르는 곳 중의 하나가 통일신라시대 연못과 별궁이 있던 안압지(雁鴨池)다.발굴, 정비가 이뤄지기 전에는 자연적인 연못과 건물터인 듯한 몇몇 유구만 있었는데 1974년 11월 연못 준설공사를 하던 중 많은 기와편과 와당들이 출토돼 75년 3월~76년 12월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본래 연못의 석축과 건물터가 발견됐고, 3만 3,000여점의 유물이 쏟아져나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안압지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 등 여러 곳에 실려있다.

‘문무왕 14년(674년)에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과 임해전의 보수ㆍ중수, 연희 기록 등은 당시 이 유적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신라 멸망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고려 때 기록은 찾을 수 없고 조선시대에는 김시습, 강 위 등이 읊은 시를 통해 황폐한 모습만 전해진다.

당시 경주고적발굴조사단 단장을 맡아 발굴을 지휘한 필자는 화려했던 한 나라의 역사 현장이 이렇게 비참해질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신라인들의 호사스러웠던 생활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우선 연못의 생김새부터 현대인들이 놀랄 만한 구상이다. 호안 석축 길이가 1,285㎙, 넓이가 4,738평에 이르고 연못 안에는 세 개의 섬을 조성했다.

석축은 동곡서직(東曲西直)으로 서쪽 전각에서 동쪽의 요철해안(凹凸海岸)이 아스름하게 보이도록 조화롭게 표현했다.

물 흐름 처리도 기묘하다. 지상의 노출 석구(石溝)를 통해 흐른 물이 용이 새겨진 석조(石槽)를 통과해 연못으로 흘러들면 폭포처럼 2단으로 떨어져 바로 앞 섬에서 양쪽으로 갈라진 뒤 출수구로 흐른다.

물은 소리(聲)가 나야 하고, 흘러야(流) 하고, 빛(光)이 나야 한다는 정원수의 기능을 최대한 표출한 것이다. 출수구 쪽에도 수위 조절석을 두어 물 높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게 설계됐다.

유물은 건물에 부착되었던 화려한 금구(金具)를 비롯해 발걸이 금동물상 향로 등 생활용품 2,000여 점과 목조건축부재 목선 와전류 등이 발굴됐다.

특히 일본 정창원이 소장한 유물과 같은 금동가위 금동완 등이 발견돼 정창원 유물 중 상당수가 신라의 유물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놀라웠다.

워낙 대단한 유적이라 발굴 과정에 우여곡절도 많았다.

못 바닥에서 발견된 길이 6.2m, 최대 폭 1.1m의 나무배를 옮기던 중 뒤를 받치던 인부들이 주저앉는 바람에 중간 부분이 갈라지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나는 책임을 통감하고 사표를 냈으나 반려됐다. 출토 유물 중 14면체의 각 면에 ‘한번에 세잔 마시기’ ‘시 한 수 읊기’ 등 글귀가 새겨져 당시 놀이문화를 엿볼 수 있는 참나무 주사위가 보존처리 과정에서 기기 고장으로 잿더미가 돼 버린 일도 두고두고 아쉽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보존 처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보존과학기술을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김동현 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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