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7월18일 러시아 출신의 미국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이 86세로 작고했다. 야콥슨은 음운론ㆍ문법학ㆍ시학ㆍ운율학ㆍ언어심리학ㆍ정보 이론 등 언어학의 모든 분야에서 휘황한 이론의 궁전을 세운 지적 거장이다. “나는 언어학자다. 언어와 관련된 것 치고 내게 무관한 것은 없다”는 그의 발언은 좁은 의미의 언어학만이 아니라 인접 과학으로까지 거침없이 뻗어나갔던 그의 탐욕스러운 지적 먹성을 요약한다.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야콥슨은 20대에 체코의 프라하로 이주했다가 1939년 나치스를 피해 미국으로 갔다. 그는 자신의 발길이 닿은 곳 모두를 학문의 성지(聖地)로 만들었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시클로프스키, 튀냐노프 등의 동료들과 함께 마르크스주의 예술 이론에 맞서 예술의 자율적 기능을 중시하는 러시안 포멀리즘 운동을 주도했다. 러시안 포멀리스트들이 보기에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쓰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쓰는가였다.
프라하에서 야콥슨은 체코인 동료 마테지우스, 하브라네크, 트른카 그리고 동향의 벗 트루베츠코이 등과 더불어 20세기 구조주의 언어학의 출발점이 될 프라하 언어학 서클을 만들었다. 언어의 어떤 요소도 체계 바깥에서는 관찰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프라하 학파는 러시안 포멀리즘의 유산을 상속하고 있었다.
야콥슨은 특히 자신이 음운론에 도입한 ‘대립(Opposition)’의 개념을 형태론과 통사론에까지 전용해 언어의 모든 형식을 체계 전체의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순수한 대립 가치로 파악했다. 대서양을 건너 처음 정착한 뉴욕에서 야콥슨은 프랑스인 동료 앙드레 마르티네와 함께 뉴욕 언어학 서클을 만들어 프라하 학파의 이론을 미국에 이식했다. 그 뒤 야콥슨이 교편을 잡은 하버드와 MIT는 오늘날 언어학의 중심 대학이 되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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