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현씨의 시집 ‘내 몸이 유적이다’(문학동네 발행)를 읽다가 ‘기역을 중심으로’라는 재미있는 시와 마주쳤다.한글 닿소리 글자 ‘ㄱ’을 시상의 출발점으로 삼는 시다.
실상 시집 ‘내 몸이 유적이다’에는 말 자체에 대해 발랄하고 짓궂은 탐색을 수행하는 작품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다.
한 편의 시나 한 권의 시집으로 들어가는 문은 여럿 있을 수 있겠지만, ‘내 몸이 유적이다’의 내부로 들어가는 문 가운데 하나는 말의 문이다. 말할 나위 없이 시는 가장 섬세하고 정교한 말의 예술이다.
그렇다면 ‘내 몸이 유적이다’는 부분적으로 ‘말에 대한 말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역을 중심으로’는 그 ‘말에 대한 말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그 말이 오직 말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기역을 중심으로’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첫 행은 ‘ㄱ,’이다. 한글의 첫번째 닿소리 글자가 덩그렇게 놓여져 한 행을 이루고 있다. 더 나아가 이것 자체가 한 연을 이루고 있다.
이 시를 낭독할 때 첫 행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물론 ‘기역’이라고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글자의 이름을 읽는 것이지, 이 글자의 소리값을 내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말 자음은, 그것을 ‘닿소리’라고 부르는 데서도 알 수 있듯, 모음의 도움 없이 홀로는 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ㄱ’ 은 소리 내어 읽을 수가 없는 표기다. ‘그’라고 읽는 체하다가 둘째 음소를 발음하지 않거나 ‘윽’이라고 읽는 체하다가 첫째 음소를 발음하지 않아야 하겠지만, 한국어 화자에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화자는 둘째 연에서 ㄱ 의 그 종속성을 타박한다.
“홀서 서지 못하고 영원히/ 모음의/ 오지랖이나 발치에 빌붙어서 살아가는.”
이어 화자는 ㄱ 으로 끝나는 말들을 읊어본다.
“ㄱ 이 받치고 선/…/ 개혁/ 자의식/ 교각/ 가족/ 교육/ 쾌락/ 권력/ 마약/ 묵시록/… ”
그러던 화자는 문득 “토대가 불안하다”고 느낀다.
토대란 ㄱ 인데, 그 굽어진 생김새가 영 안정감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ㄱ 을 두드려 편다/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으으으으으으으으…./ 곳곳이 붕괴된다.”
굽은 ㄱ 을 ㅡ 로 펴놓으니 그 위의 건조물들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 무너지는 건조물들은 개혁, 교각, 가족, 교육 같은 것들이다.
그 결과는 당연히 “아비규환”이다. 삼풍 백화점 사건이나 9ㆍ11 사태를 생각해 보자. 그 아비규환 속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외침이 들린다. “—여기요, 여기!”
문이라도 보이면 그리로 탈출하면 될 텐데, 문이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화자는 투덜댄다. “ㄱ 이 떠받치고 서 있던 세계/ 도대체 들고나는 문은/ 어디 있었던 거지?”
이 시를 개혁이나 가족이나 교육의 부실함에 대한 야유로 읽는 것은, 불가능한 읽기는 아니지만, 재미없는 읽기다.기자는 이 시를그저 즐거운 말놀이로 읽었다.유쾌하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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