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경제는 순항하고 있다. 기업의 수익성이 전반적으로 호전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성장률도 5∼6%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미국 증시의 극심한 침체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가는 오히려 반등하여 800선 부근에서 버텨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부도 위기에 몰린 대기업이 새로 눈에 띠지 않는다. 1997년 시작되어 5년여 동안 우리 경제를 뒤흔들었던 구조조정의 시대가 이제 바야흐로 끝나 가는 것 같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요즘 같이 경제가 전반적으로 안정적이고, 정부가 특별히 대응을 서둘러야 하는 중대한 사태나 현안이 눈에 띠지 않은 시기는 1990년대 초반 이후 처음이 아닌가 한다.
반면 1997년 이후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제도를 서구 선진국의 기준에 맞도록 고치라고 강요하던 미국이 오히려 대기업의 회계부정과 지배구조의 문제로 고초를 겪고 있다.
이러한 양국 경제의 모습을 보며, 미국이 우리나라의 경제제도에 대해 개선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거나, 지배구조나 회계투명성 문제는 전세계적인 문제이고 따라서 우리가 특별히 이 문제에 대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거나, 또는 우리의 구조조정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는 등의 의견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안이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배구조 문제는 돈의 주인과 운영자가 동일인이 아닌 상황에서는 언제나 발생할 수 있다.
미국처럼 자본주의의 역사가 길고 주식회사와 금융에 관한 각종 제도가 발달한 나라에서도 회계투명성과 기업의 지배구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경우 그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지난 4년간 우리가 했다는 소위 구조조정 작업은 대부분 대기업과 금융기관에 존재하던 부실을 인정하고, 막대한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하여 국민이 이를 대신 갚아주는데 그쳤다.
보다 중요한 것은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지배구조와 금융규제를 강화하여 구조적인 부실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많은 법령이 만들어졌고, 법의 집행력도 과거에 비해 개선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관한 문제점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었다기 보다 약간 개선된 채 수면하로 잠복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또한 금융자원의 배분과 대기업의 지배구조에 대한 정치권의 구조적 개입이라는 추가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겪은 경제위기도 결국 국민이 금융기관에 맡긴 막대한 자금을 정치권과 연계된 일부 대기업에게 대출하도록 하고, 지배주주 등 경영진이 이를 유용하거나 잘못 운용한 결과 기업이 부실화해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된 후에도 채권금융기관으로 하여금 계속 부당한 지원을 하도록 한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관료와 금융기관 임직원들의 승진, 처벌, 보직 등을 결정하는 권한을 쥔 정치인들이 이 권한을 남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고 운영했기 때문이다.
최근 발생한 일련의 사태는 정치권에서 금융기관의 경영에 개입할 여지가 여전히 크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겉으로는 법령 등 제도를 개선하였으나, 정치권의 불법적인 개입을 방지할 수 있는 수준의 집행력이 따라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수천억~수조원의 돈이 걸려 있는 기업주, 자신의 모든 커리어가 걸려 있다고 믿는 관료와 금융기관 임원, 이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정치권의 담합을 깨지 못하는 한 우리 경제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구조조정을 냉정하게 시작할 때이다. 우리도 이번에 미국과 같이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지배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제도의 도입에 착수해야 한다.
특히 특별법을 통해 정치권에서 금융기관의 경영에 개입하는 행위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남일총 KDI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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