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등산로 입구 노점 앞에서 그 노인이 내 엉덩이를 만졌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나는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했는데 작달막한 그는 방긋이 웃고 있었다.
정오도 되지 않았는데 등반을 마치고 동동주를 걸친 모양이었다. 그 웃음이 나를 무장해제 시키고 나쁜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리벙벙해진 나는 다시 그러지 말라는 뜻에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는데 그는 갑자기 얼굴에서 웃음을 걷어내고는 어설픈 영어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하우 올드, 하우 올드 유 씽크(내가 몇살이나 되 보여) 예순 일곱이야 예순 일곱. 너 몇 살이야”막걸리를 마시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서 나를 향했고 그의 고함은 계속됐다.
나는 그가 갑자기 돌변하기까지의 상황이 무척 낯설었다. 노인은 사찰 입구에서 보았던 사천왕상처럼 눈을 부라렸고 나도 한껏 눈에 힘을 주었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등산로에 오르자 노점의 소음과는 대조적으로 완벽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원효봉을 향하면서 노인의 순박한 미소와 갑작스런 분노를 다시 한 번 생각했다.
1,000년전 이 곳에서 잠시 수도했던 원효를 기리는 작은 사찰이 있었는데 그가 도를 닦았다는 동굴에 들어서며 그의 ‘일심(一心)’사상을 떠올렸다.
일심이란 우리 모두 하나의 마음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던가.
시원한 동굴 안에서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내가 화를 내지 않았다면 그저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제단 위 부처 옆 사천왕상을 바라보니 그 커다란 눈이 매우 우스웠다. 문득 둘 다 자신의 ‘보편성’을 고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화를 낸 것은 각자 보편적이라 믿었던 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의 충격 때문이었다.
그가 장난스레 내 엉덩이를 만졌을 때, 그는 내가 생각하는 보편을 넘어섰고, 내가 나보다 마흔 살이나 많은 노인의 머리에 손을 올렸을 때 나 역시 그가 믿는 보편성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스스로 ‘보편적 예의’라 생각되는 것을 고집스럽게 밀어 부쳤던 것이다.
물론 둘 다 예의에 어긋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는 조금 취했고 나는 약간 놀랐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다시 노인을 만나 함께 동동주를 마시고 싶었다.
우리가 사천왕상의 화난 표정을 벗어 던지면 함께 웃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말하고 싶었다. 이는 원효의‘일심’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웨인 드 프레머리 서울대 국제지역원 석사과정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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