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력서] 이주일(87)사랑하는 아내와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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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87)사랑하는 아내와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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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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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분당 집에 살아오면서 해마다 큰 보람으로 삼는 일이 있다.매년 12월 김치를 담가 장독 20여 개에 나눠 묻어두었다가 겨우내 이웃 노인들에게 나눠주는 일이다.

맑은 날이면 장독 뚜껑을 열어 햇빛과 바람을 쏘이는 일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가

난했던 젊은 시절에도 김장독만은 담요에 싸서 단칸방 구석에 보물처럼 모셔둔 나였다.

지난해 12월에는 집사람에게 “내가 몸이 이러니까 올해는 김장을 조금만 하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내는 펄쩍 뛰었다.

“당신 몸이 다 나으면 손님들이 많이 올 테니 더 많이 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나을 것이라는 신념으로 9개월째 내 옆 자리를 지켜줬던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지칠 줄 모르고 나를 보살피는 것은 역시 마누라밖에 없다.

아내와 아이들 생각을 하면 나는 천하에 몹쓸 남편이자 아버지이다. 얼굴이 예뻤던 집사람은 젊은 시절 내게 점 찍혀 지금까지 고생만 해왔다.

1962년 군예대 시절 결혼했으니 벌써 40년째다.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험했으면 결혼 후 6년 만에 밥상을 들여놓았을 때 아내가 “더 이상 여한이 없다”고 말했을까.

여기에 내가 결혼한 지 1년도 안 돼 고2짜리 여학생과 눈이 맞았을 때부터 아내는 여자 문제까지 고심해야 했다.

어렵게 살아왔기 때문인지 아내는 지금도 절약 정신이 몸에 배어 있다.

지난달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아내가 백화점에서 메론 하나를 사 병실로 가져왔다. 그런데 반을 쪼개보니 곪아 있는 게 아닌가.

보통 집 같으면 재수가 없어서 그러려니 하고 말았을 일을 아내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거 다시 붙여서 내일 물어 달래야지. 세상에 백화점에서 이런 과일을 파는 경우가 어디에 있어?”

이런 일도 있었다. 큰 딸 미숙(美淑ㆍ39)에게는 임채은(7)이라는 초등학교 1학년짜리 딸이 있다.

5월 학교에서 연극 발표회가 있었는데 학교에서 의상 한 벌씩 준비해오라고 한 모양이다.

나는 “가까운 가게에서 아무 옷이나 하나 사라”고 했는데 아내는 “어디 빌려올 데가 없느냐”고 물었다.

결국 나는 후배 코미디언 이용식(李龍植)에게 부탁해 방송사 의상실에서 2벌을 빌려오고 말았다. 참 대단한 여자이다.

아이들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91년 세상을 먼저 뜬 아들 창원(昌元)이는 이 아버지를 한때 부끄럽게 여기기도 했다.

생활기록부에 아버지 직업을 항상 ‘상업’이라고 적었다. 연예인이라고 쓰면 누구냐고 물을 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극단 쇼를 알리는 포스터가 동네 벽에 붙는 날이면 누가 볼 새라 포스터 한 귀퉁이를 찢곤 했다. 포스터에는 무명 사회자인 아버지의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실려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에는 내게 이렇게 말해 혼이 난 적이 있다.

“아버지, 친구 놈들은 다 자가용 타고 다니는데, 저도 포니 중고라도 한대 사주세요.” 나는 그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야단을 쳤다.

“그렇게 자가용 타고 싶으면 내 차를 타. 내가 버스 타고 다닐 테니까 네가 벤츠를 타라구. 건방진 녀석.”

이렇게 엄하게 키운 아들 놈인데 술을 먹고 기사랑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으니 그 야속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다.

두 딸에 대한 미안한 추억도 있다. 나는 원래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다. 가정에 충실하며 완고한 편이다.

우리 딸 미숙과 현숙(賢淑ㆍ36)이는 대학에 가서도 화장을 못했다. 숨어서 립스틱을 바르고 집에 오기 전에는 지우고 돌아올 정도였다

.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것이 없다. 그런데도 하루가 멀다 하고 성남에서, 인천에서 나를 보러 찾아와주니 대견스러울 따름이다. 아내 제화자(諸花子)와 두 딸 미숙, 현숙이. 모두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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