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부국(富國) 신화’가 흔들리는 것일까. 회계부정에서 촉발된 주가폭락과 무더기 기업 도산의 후폭풍이 국민소득 3만 달러 수준을 자랑하는 미국 가계를 엄습하고 있다.늘어나는 카드 빚과 주식 손실 등으로 개인도 파산 도미노에 휘말릴 처지에 놓였다. 특히 퇴직금으로 주식에 손을 댄 노년층이 다시 일거리를 찾아 나서는 등 우울한 황혼을 맞고 있다.
14일 발간된 미국의 포천지 최신호(22일자)는 파산거래그룹인 ABI보고서를 인용, 올 1ㆍ4분기 미국의 파산신청은 역대 최고 기록인 37만 9,012건으로 이 중 97%인 36만 9,237건이 개인파산에 집중됐다고 보도했다.
개인파산의 비중은 80년대초 80%에 불과했다.
지난해 미국 연방법원에 접수된 파산신청 건수는 149만건. 이는 전년보다 19.2%나 급증한 사상 최고치로 증가 추세에 가속도가 붙는 느낌이다.
개인파산은 지난해 사상 유례없는 저금리 하에서 주택과 자동차 부문에서 소비가 과도하게 늘어난 것이 덫이 됐다. 소비자들은 신용카드와 은행 등 금융기관의 저금리 대출경쟁을 이용해 주택회사의 모기지상품(장기저리 주택담보대출)을 통해 앞다퉈 내집 마련의 꿈을 이뤘고 자동차 회사로부터도 다양한 할부서비스를 받았다. 또 대출금의 상당 부분은 주식시장에도 흘러 들어갔다.
이 같은 소비행태와 주식투자 심리의 밑바닥에는 올해 경기회복에 대한 강한 기대감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경기회복은 갈수록 지연되고 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뜻밖의 회계부정 사건으로 주식시장마저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면서 미국 가정으로 날아드는 연체통지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3월 미국인들의 총 카드대금 중 연체 금액의 비율(납부기한이 30일 이상 지난 채무액의 비율)은 5.54%에 달해 지난해 같은 기간의 4.93%에 비해 크게 급증, 97년 6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올초 카드업체들이 연체이자율을 11.95%에서 22%로 대폭 올리면서 카드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태세다. 전문가들은 카드 빚과 주식시장 침체로 올 개인 파산자들이 15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우려했다.
회계부정 사건에 따른 주식 침체는 누구보다 은퇴를 전후한 장ㆍ노년층에게 큰 절망감을 안겨주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14일 은퇴 후 편안하게 살다가 부유하게 눈을 감으려고 계획을 짰던 미국 장ㆍ노년층들이 주가 폭락의 여파로 해외 여행을 포기한 채 다시 직업을 찾아 나서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2002년 6월 현재 55세 이상 경제활동 참가율만 유일하게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8.4%(160만명)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연령층의 취업 증가는 주가 폭락이 직격탄이었다. 주식시장 호황에 들뜬 55~64세 사람들은 보다 안정적인 상품에 돈을 맡겨야 한다는 투자원칙을 무시한 채 미국인 전체 평균보다 2배 이상 가까운 돈을 최근 몇 년간 주식에 투자했다.
젊은 투자자와는 달리 순발력과 판단력이 떨어지는 이들 중 상당수는 월드컴 등 기술주에 투자했다 투자원금을 깡그리 날렸다. 최근 코너티컷에 있는 한 카지노에서 일자리를 찾은 한 60대 부부가 대표적 예다.
이들은 90년대 중반 뉴욕 맨해튼에 있는 고급 주택과 해변 별장을 갖고 있던 백만장자였다. 이들은 집을 처분한 돈으로 기술주에 집중 투자했다 450만달러의 원금을 거의 모두 잃어버렸다.
뉴욕 타임스는 주가 폭락으로 은퇴를 늦출 수밖에 없게 된 미국의 노인들이 일련의 회계부정 사건에 대해 절망을 넘어서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김병주기자
bj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