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일하는 국립수목원에는 덩굴식물원이 있습니다.다래, 머루, 오미자, 노박덩굴, 사위질빵, 으름, 담쟁이덩굴…. 이 덩굴식물 중에는 유난히 먹거리가 많아서 생각만으로도 친근한 느낌이 듭니다.
또 그곳에 가면 옛날 이야기가 하나 생각납니다.
옛날에 숲 속에서 온갖 식물들이 누가 가장 강한지를 판가름하는 챔피언 쟁탈전이 있었답니다.
많은 식물들이 세상의 거친 환경과 맞서 살면서 갖게 된 스스로의 갖가지 무기를 가지고 싸워 올라가다가 결승전에 두 식물이 남게 되었는데 머루와 천남성이었습니다.
천남성은 무기가 독(毒)이었고 머루는 다름 아닌 신맛이었습니다. 결과는 머루의 승리였습니다.
옛날에는 신맛이 왜 그리 무서운지, 귀신도 쫓았다는 이야기가 여러 곳에 나옵니다.
여하튼 머루는 요즘말로 기(氣)가 살아 무엇이든 감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덩굴식물이 되었고 천남성은 키 작은 풀이 되었답니다.
이렇게 옛 이야기에서는 머루가 덩굴이 되어 올라가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알고 보면 당연합니다.
광합성에 꼭 필요한 햇볕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지요.
햇볕을 잘 받으려면 큰 키나무처럼 키를 키워도 되지만 그러려면 식물체를 바로 서도록 지탱하고 유지하는 데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니 이를 덜기 위해, 좋게 말하면 생태적인 전략이고 나쁘게 말하면 애써 자라는 다른 나무에 편승하여 키를 높인 약삭 빠른 식물인 것입니다.
또 다른 궁금증은 대체 덩굴들은 눈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자신이 감고 올라갈 대상이 있음을 알까 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동물이 갖고 있는 신경조직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잎 혹은 줄기의 일부가 변한 덩굴손이 자유롭게 허공에 흔들리다가 바람 혹은 그 어떤 원인으로 주변에 감고 갈 대상에 닿으면 일종의 호르몬이 분비되어 1∼2분 안에 자극이 온 방향으로 자라던 방향 바꾸기를 계속하면서 물체를 감게 되는 것이죠. 한바퀴 감는 데는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립니다.
덩굴손 중에는 용수철처럼 여러 번 감긴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람 같은 충격에 끊어지지 않도록 완충작용을 할 수 있게 하는 배려이지요.
이렇게 연약하고 유연하던 덩굴손이 일단 말리면 얼마나 단단한지 호박의 경우 가녀린 덩굴손 하나가 적어도 500g을 견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덩굴식물을 보며 옛이야기를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 식물들은 현대사회를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도 아주 적합한 마인드를 갖고 있는 듯 싶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가을이면 익어갈 빨간 오미자와 새콤한 머루생각이 벌써 간절합니다. 어떻게 이 여름을 견디며 기다리지요?
/이유미ㆍ국립수목원 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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