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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先憂後樂이 아쉬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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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先憂後樂이 아쉬운 세상

입력
2002.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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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내가 출강하던 어느 대학의 교직원 식당에는 ‘선우후락(先憂後樂)’이라는 큼직한 글자로 된 서예액자가 걸려 있었다.이 문장을 풀어 보면 ‘천하에 근심거리가 생기면 맨 먼저 걱정을 하고 천하에 즐거운 일이 있으면 맨 나중에 즐겨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중국 송나라 때 나온 이후로 관리가 지켜야 할 마음가짐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래서 이 액자를 마주 보면서 밥을 먹을 때마다 “어, 이 글귀대로 하자면 학생들이 밥을 다 먹은 뒤에 교수는 맨 나중에 밥을 먹어야 하는데…” 하는 농담을 하곤 하였다.

이 학교에 출강을 그만둔 지 몇 년 후에 우연히 식당 주인 아저씨가 병환으로 일찍 타계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다시금 이 액자의 깊은 의미에 숙연해졌던 기억이 있다.

주인 아저씨는 지배층이 지켜야 할 덕목인 선우후락을 스스로 지키려 하다가 병을 얻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구내식당 운영을 단순한 영리사업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고객인 학생, 교직원 모두가 만족한 뒤에야 비로소 안심하는 그런 자세로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선우후락이란 글귀의 액자를 걸어놓은 것이라면 나의 생각이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송나라 때에 나온 주자학에 대해서는 사실 호감보다는 반감이 더 큰 편이다. 지나치게 위아래의 위계질서를 강조하고 남존여비를 당연시하여 동아시아에서 민주적이고도 평등한 사회로의 발전을 저해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자학자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겼던 선우후락과 같은 지배층의 윤리의식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오늘날처럼 눈만 뜨면 권력형 부정부패가 온통 신문과 방송 뉴스를 도배하는 때에는 더욱 더 그러하다.

공교롭게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역대 대통령의 아들들이 차례로 부패의 주역이 되어 영어의 신세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이미 출옥한 한 아들은 국회의원에 출마하려 한다는 소식이 지상에 오르내린다.

아들을 자신의 재임 중에 감옥에 보낸 두 대통령이 야당 시절에 어려움을 겪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랬기 때문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자식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감안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4·19혁명과 유신반대투쟁, 광주의 민주화항쟁과 6·10항쟁과 같은 민주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불우한 시절을 보낸 것이 유독 그들 몇 사람뿐이었겠는가?

지금도 세상에는 민주화의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고도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불우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의문사를 당하고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아 원혼으로 떠도는 이들까지 있다.

그런데 민주화의 최대 수혜자가 된 최고 권력자의 아들들이 단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부패를 저질러도 어느 정도 양해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 어떻게 나올 수 있겠는가?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고 박해했던 군사 정권의 대통령 두 사람을 감옥으로 보낸 경험을 한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의 부패는 더욱 용납이 되지 않는다.

그 정부의 실세 몇 사람의 부패가 그 동안 자신의 사적인 이해관계를 돌보지 않고 선우후락적인 자세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욕되게 하기 때문에 국민의 분노는 그만큼 더 거센 것이다.

민주화를 위해 박해를 감수하였다는 이들이 선우후락의 윤리를 조금이라도 실천했다면 자기 자식들이 범죄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얼마 전 6·13 지방선거에서 야당은 현 정권의 총체적 부패를 심판하겠다는 구호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바로 그 야당출신 시장이 자신의 사위와 아들을 불러다가 거스 히딩크 감독과 사진을 찍게 하고 태풍이 닥치는 상황에서 부인의 동창회에 가서 강연을 했다고 한다. 정말로 선우후락의 윤리가 아쉬운 세상이다.

/윤혜영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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