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나는 심한 방황을 했다. 유신이 시작되면서 술을 퍼마시고 거리를 헤맸다.한 동안 그렇게 지내다가 다시 역사 공부에 몰두했다.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인물을 찾던 나는 허 균(1569~1618)에 주목했다.
그는 명문 집안에 태어난 기득권 세력으로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아 출세가 보장돼 있었다.
그러나 소외층을 대변했고 주자학적 교조성을 배격, 불교 도교 양명학 서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선비들이 얕잡아 보는 소설에도 경도돼 ‘홍길동전’을 썼다.
신분에 따라 인간의 능력이 무시되고, 부정부패로 사회가 분열되는 시대에 목숨 걸고 개혁의 기치를 내건 모습이 마음을 끌었다.
유신시대에 사회에 던질 설득력 있는 인물이라는 판단도 들었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글을 찾아 읽었는데 대부분 개혁사상보다 ‘홍길동전’의 작가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시문집인 ‘성소부부고’를 읽었다. 역적으로 몰려 끌려갈 때 죽음을 예감하고 사위의 집으로 보내 보관한 책이다. 글은 그가 죽은 뒤에도 여러 사람이 읽었던 모양이다.
정조는 이를 알고 허 균이 죽은 지 170여년 지나 그 책을 가져와 정사(淨寫)해 보관토록 했다.
한문 문장은 화려하면서 어려웠다. 나는 어설픈 한문 실력 탓으로 줄을 그으며 읽었고 그래도 풀리지 않으면 대가들에게 물어보았다.
책은 그의 개혁 사상을 담고 있었는데 특히 잘못된 지도자는 민중이 타도할 수 있다는 호민론(豪民論)과, 혈연이나 학벌을 타파하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자는 유재론(遺才論)에 매료됐다.
2년쯤 씨름을 한 끝에 81년 ‘허균의 생각’이라는 단행본으로 냈는데 베스트 셀러가 됐다.
그런데 정보기관에서 민주화 운동을 한 학생들의 집을 뒤져 압수한 증거물 가운데 이 책이 번번이 들어 있었다.
또 월간 ‘뿌리깊은 나무’는 검열 때문에 지면을 다 채우지 못하자 이 책의 개혁사상 부분 600여장을 그대로 전재해 잡지를 냈다.
단행본 ‘허 균의 생각’을 낸 곳도 바로 뿌리깊은 나무였는데 이도 당국의 비위를 거슬렸다.
책은 그 뒤 금서가 됐다. 정보기관은 또 내가 잡지 등에 글을 실으면 곧바로 전화해 압력을 넣었다.
아무튼 허 균의 저술은 나의 역사서술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허 균처럼 험한 시대에 산 탓으로 작은 수난도 겪었다.
이이화 역사학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