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유전학이 역사를 바꾼 초파리' 마틴 브룩스 지음지난 100년 간 실험실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그야말로 파리 목숨 신세로 죽어간 무수한 초파리들을 20세기 유전학 발달의 숨은 영웅으로 찬양하는 책이 나왔다.
‘초파리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영국의 과학비평가 겸 진화생물학자 마틴 브룩스는 ‘20세기 유전학의 역사를 바꾼 초파리’ (원제 an experimental life, 2001) 서문에 이런 제목을 붙였다.
‘존과 요코에게 이 책을 바친다’는 헌사와 함께. 존과 요코는 그의 실험재료가 된 초파리 한 쌍의 이름이다.
200만 종이 넘는 생물 중에서도 하찮은 존재, 포도 씨앗보다 작은 몸통에 가녀린 날개를 달고 먹다 남은 과일 조각에 날아드는 이 성가신 녀석들이 뭐 그리 대단할까.
이 책을 읽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유전자 치료에서 인간 게놈(유전자 지도) 프로젝트까지 현대 유전학의 모든 것이 초파리 연구에서 비롯됐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1900년 실험실에 데뷔한 초파리가 생물학의 총아로 떠오른 것은 1910년. 미국 콜럼비아대 교수 토머스 헌트 모건이 초파리 연구를 통해 멘델의 유전법칙을 증명하면서부터다.
그뒤 유전학, 발달생물학, 행동유전학, 노화와 장수 연구, 진화와 종의 기원에 이르기까지 초파리는 20세기의 위대한 생물학적 발견에 핵심 역할을 해왔다.
초파리의 게놈 구조가 인간과 똑같기 때문에, 각종 신약 개발이나 학습장애, 뇌졸중, 알츠하이머병 등의 유전자 치료도 초파리 연구를 바탕으로 이뤄지고 있다.
책은 초파리와 유전학의 세계를 알기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위트 넘치는 글로 흥미진진하게 쓰여져 술술 읽힌다.
지은이의 익살과 재치는 곳곳에서 폭소를 자아낸다.
초파리를 “무심결에 뚜껑을 연 채 잔디밭에 놔둔 도시락에다 순식간에 임시 러브호텔을 마련하는 녀석”이라고 소개하는가 하면, 초파리의 정액이 암컷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독성을 지녔음을 설명하면서 초파리 암수가 치르는 이 위험한 ‘화학전’에 비하면 인간 남녀의 다툼은 얼마나 사소한 것이냐, 더 이상 누가 설거지를 하느냐 따위로 다투지 않겠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유전학이라는 딱딱한 분야를 유쾌하게 요리한 영양 만점 교양서다.
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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