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호주로 이민을 갔다가 부인과 딸 둘만 남기고 혼자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김모씨(38. 영어강사).그는 여름휴가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여름휴가를 이용, 가족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 여름의 상봉을 생각하면 마냥 가족재회가 기다려지는 것만은 아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그가 서울 집을 나서 시드니까지 18시간 만에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기진맥진해 만난 아내로부터 들은 첫 마디였다.
휴가 내내 고장난 문을 고치고 전구를 갈아 끼우고, 잔디를 깎다 돌아왔다는 그는 “보고 싶은 가족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오히려 마음 상하는 일이 많았다”고 말한다.
#2.미국에서 공부하는 자녀들을 뒷바라지 하느라 남편과 떨어져 지내는 김모씨(40. 주부)는 아이들 방학으로 1년 만에 한국에 들어왔다가 남편을 만나자마자 대판 부부싸움을 벌였다.
빠듯한 생활비로 늘 검소하게 지내왔던 그는 남편이 자신 몰래 새로 구입한 골프채며 헬스클럽 회원권을 보고 치밀어오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3.캐나다에 자녀와 아내를 유학보낸 지 3년째인 박모씨(43.의사).
출장이나 틈이 날 때마다 가족들을 찾는 그는 이번 여름휴가에도 가족에게 날아갈 작정이다. 그러나 지난 겨울 크리스마스 휴가는 씁쓸한 기억으로 남는다.
현지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부인 덕분(?)에 휴가 내내 지역사회의 온갖 사교 모임에 따라다녀야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은 친구들과의 스키여행, 파티 등으로 분주해 가족들만의 오붓한 시간 역시 가질 수 없었다.
■달라진 생활습관이 갈등으로
자녀들의 조기유학으로 남편과 아내가 따로 떨어져 살면서 1년에 한두차례 밖에 만나지 못하는 신이산 가족이 늘고 있다.
주로 여름휴가나 방학을 이용해 이들의 재회가 이루어지지만 의외로 어색하거나 씁쓸하게 끝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처음 며칠은 신혼초로 돌아간 듯 달콤함을 맛보지만 금방 가족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우선 떨어져 지내는 동안 생활습관이 달라지면서 함께 지내는 것 자체가 서로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걸 먹으라, 이 옷은 입지 말라’ 같은 아내의 주문은 독신의 자유로움에 길들여진 남편에게 짜증스러운 간섭이 될 수 밖에 없다.
또 아내의 입장에서는 외로움 때문에 늘어난 남편의 주량이나 무절제한 생활태도가 불만스러울 수 있다.
돈 씀씀이도 문제가 된다. 보통 남편들이 보내주는 생활비에 대해 아내와 자녀들은 고마움을 표시하기보다 당연하게 여기며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다.
남편은 ‘돈 버는 기계’라는 자괴감을 느끼게 되고 모처럼 만난 아내와 자녀들의 사소한 지출에 대해서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며느리로서의 역할 등 가족관계에 따른 갈등도 튀어 나온다. 남편은 서울에 온 아내에게 ‘오랜만의 며느리노릇’을 강요하지만 피곤한 아내는 ‘친정과의 형평성’을 내세우며 이를 거부하게 된다.
■원만하게 부부갈등 해소하려면
가족상담을 주로 하는 카운셀러들은 “자녀교육을 위한 별거는 어쩔 수 없이 부부관계를 희생시키게 된다”고 입을 모은다.
떨어져 있는 거리와 시간만큼 부부로서의 유대감은 약화될 수 밖에 없다. 떨어져 지내는 동안 성적인 욕구를 감당 못한 남편에게 외도의 위기가 닥칠 수도 있다.
열린마음클리닉 이근후 원장은 “가족의 중심은 부부이지 자녀가 아니다”면서 “조기유학을 위한 별거는 작은 것을 얻을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보다 큰 것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는 “떨어져 살아도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문제”라고 말한다. 그만큼 부부에게 떨어져 지내는 것이 나쁘다는 것.
서로의 생활에 충실하면서 건강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사실은 외로움과 불편함을 참고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지 갈등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가족상담교육연구소 최규련 부소장(수원대 아동가족학과 교수)은 “부부사이의 신체적 접촉이 불가능해지면서 웬만한 갈등도 원만하게 해소되지 않는데 신이산가족의 문제점” 이라면서 “부부사이는 이메일이나 전화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근후 원장은 “떨어져 있는 동안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보상 받으려는 심리가 양쪽 다 강하기 때문에 오랜 만에 만났을 때의 실망도 크다”고 말한다.
평소 갈등이 많았던 부부일수록 문제는 더 커진다.
신이산가족 가운데는 ‘자녀교육’은 명분이고 실제로는 부부갈등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별거를 선택한 경우도 적지 않다.
자녀 교육이란 핑계로 합법적인 별거에 들어가는 셈이다. 이런 경우 1년에 1, 2번 만나는 것조차 어거지 만남이기 때문에 즐거울 리 없다.
상담문화연구원 심상권원장은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조기유학을 선택한 경우라면 부부 사이의 ‘핫라인’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전화 메일 채팅 등 통신수단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것. 매일 아침 남편의 출근시간에 맞춰 아내가 메일을 보내거나 컴퓨터에 카메라를 설치, 자녀와 아빠가 매일 인터넷 화상대화를 시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 하면 어’ 하는 식의 두 사람만의 언어도 필요하다. 부부간 대화는 사전적 의미 이상의 두 사람만의 경험과 비밀이 담긴 언어를 구사할수록 좋다.
부부만의 대화법으로 잠들어있는 상대방의 애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 오랜만에 서로 만났을 때는 상대방의 어려움을 먼저 신중하게 생각하고 다독여 준다면 상대방도 쉽게 감정의 앙금을 풀고 사랑으로 화답할 수 있다.
부부에 따라서는 싸움도 갈등해결 방법이 될 수 있다. 싸움 뒤 화해를 통해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심원장은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5년 이상 부부가 떨어져 사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한다.
김동선기자
ween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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