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대통령 후보 경선을 전후해 반짝했던 정치개혁 조치들이 속 속 원위치 하고 있다.우선 대통령 후보는 물론 국회의원과 자치단체장 후보를 개방형 경선으로 뽑겠다는 다짐이 8ㆍ8 재ㆍ보선 공천과정에서 완전 실종됐다.
민주당은 지방선거 참패의 원인 중 하나가 자유경선으로 인한 적전분열이라고 말한다. 경선결과에 불복해 독자 출마한 경우가 많았고, 이는 어김없이 한나라당 후보의 당선을 가져왔다는 분석이 공식 제기됐다.
또 경선과정에서 공공연한 금품살포가 있었고, 대의원과 유권자들이 이를 공개리에 요구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상당수 민주당 의원들은 지방선거 후보를 결정한 지구당 자유경선을 악몽으로 기억한다.
무정부 상태에 버금가는 혼란속에서 매표가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경선후유증이 그대로 선거결과에 반영됐다고 한숨을 쉰다.
자유경선에 고개를 젓기는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다. 국민경선이 불러일으킨 ‘노무현 돌풍’에 놀라 울며겨자먹기로 뒤따라가기는 했지만 할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이미 내려졌다.
자유경선을 통한 상향식 공천으로는 재ㆍ보선에서 이길 수 없다는 데 대해 양당 모두 이론이 없는 셈이다.
양당 지도부가 당헌ㆍ당규에 명기됐거나 이미 공언한 상향식 공천을 묵살하고 있는데도 어느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재ㆍ보선에서 이겨야 대권가도가 탄탄하다는 현실앞에서 딴소리를 했다가는 역적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크로스 보팅(자유투표)을 처음 도입한 개정 국회법 정신에 따라 국회의장을 자유투표로 뽑겠다는 합의도 물거품이 됐다.
당론투표 때 보다 오히려 심한 표단속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총무단과 후보희망자 사이에 욕설이 오갔다.
2명의 국회부의장을 의장을 내지 못한 당에서 1명씩 나눠먹기로 한 것이나, 상임위원장 내정 과정의 밥그릇싸움도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의원총회에서 국회직을 자유경선을 통해 결정하자던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소위 개혁ㆍ소신파 의원들의 목소리는 온데 간데가 없다.
젊은 의원들이 주축이된 개혁ㆍ소신파 의원들은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 해 버리는’ 대권싸움에 누구보다 적극적이다.
정권을 잡아야만 정치적 장래가 보장된다는 현실적 판단 때문이다. 개혁은 명분이지만 정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상명제다.
온나라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며 대한민국의 저력을 유감없이 과시한 ‘월드컵 신화’는 지도자만 잘 만나고 정치만 개혁되면 우리도 훌륭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그간의 담론(談論)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정치권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연ㆍ학연을 초월하고 원칙에 충실하는 히딩크식 리더십이 정치에도 도입돼야 한다고 모처럼 입바른 소리를 했다.
하지만 정치권의 개혁시계는 분명히 거꾸로 가고 있다. 자유경선의 도입과 상향식 공천의 제도화에는 시행착오가 따를 수밖에 없다.
세상일에는 거저가 없고, 특히 민주주의는 많은 기회비용 지불을 요구하는 단기적으로 보면 상당히 비효율적인 제도일 수도 있다.
정치권은 지난 봄 잇단 개혁제도의 도입을 약속했을 때 이 정도 역풍은 감내할 준비가 돼 있어야 했다.
민주당은 잇단 보선참패와 김대중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로 절대절명의 위기에 몰리자 살기위해 국민경선 도입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택했다.
한나라당 역시 경선을 하지 않고서는 바닥으로 떨어진 이회창 후보의 인기를 만회할 길이 없자 할 수없이 민주당을 뒤따랐다.
양당 모두 국민의 압력 때문에 정치개혁을 하는 시늉이라도 했던 것이다.
정치권이 또 다시 정치개혁에 나서도록 하는 방법은 지난 봄의 경험이 잘 말해준다. 개혁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혼쭐이 나야만 정신을 차리는 게 우리 정치권이다.
이병규 논설위원
veroic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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