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헌정사에서 국회가 가장 일그러진 모습을 보였던 것은 역시 ‘백두진 파동’ 때가 아닌가 싶다.1979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은 10대 국회의 개원과 더불어 국회의장에 백두진 유정회 의장을 지명했다.
지금은 오래 돼 잊혀진 말이 됐지만 유신정우회의 약칭인 유정회는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지명하는, 의석의 3분의1에 해당하는 ‘의원 아닌 의원’들의 집합체를 일컫는다.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은 “국민의 손으로 뽑지 않은 의원을 국회의장으로 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발, 국회 공전사태가 빚어졌다.
■ 그러나 독재권력의 막강한 위세 앞에 신민당도 이틀 만에 굴복하고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백씨를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백씨는 10ㆍ26사태로 독재권력이 무너지자 “새로운 정치문화 형성과 국민적 화해를 약속 받을 수 있는 훌륭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어쩌면 본인 스스로 ‘자격 없는 국회의장’이었던 것을 박 대통령의 서거와 더불어 뒤늦게나마 인정한 것이었으리라.
■ 그로부터 23년이 흐른 지금, 16대 국회에 들어서야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임명하지 않은 국회의장’이 탄생했다. 과거에도 형식논리상으로는 다수당의 다수 의원 뜻으로 국회의장을 뽑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여당의 총수로 있고, 여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수당이 되어왔기에 실제로는 대통령이 국회의장을 임명해왔다.
그래서 국회의장 자리도 여당의 당직 인선 차원에서 배려되었고 종종 당직 인선 내용과 함께 내정자도 발표되었다. 자연히 의회정치는 실종될 수밖에 없었다.
■ 임기개시일을 39일이나 넘겼고 또 자유투표 방식을 외면한 ‘나눠먹기’식이었다고 해도, 비로소 국회의장이 청와대로부터 독립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상임위원장 선출은 여전히 당직 인선의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회가 오랫동안 드리워졌던 독재권력의 관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려면 상임위원장의 선출도, 국회의원의 상임위 배정에도 새로운 질서와 관행을 만들어야 한다.
신재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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