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의 하지 압둘 카디르 부통령이 6일 카불 시내 집무실 근처에서 무장 괴한들의 총격을 받고 암살돼 카르자이 수반 체제 출범 한달여 만에 아프간 내정이 위기를 맞았다.이번 사건은 카디르가 아프간 동부 낭가하르주 실권자였고 지난달 구성한 아프간 임시 정부에서 공공사업장관을 겸직하는 등 영향력이 큰 파슈툰족 지도자여서 새 정부에 큰 타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카디르 부통령은 이날 오후 12시 40분께 승용차로 공공사업부 청사를 나서다 정문 부근에 대기 중이던 2인조 괴한이 쏜 36발의 총탄을 머리와 가슴에 맞고 숨졌다고 바시르 살란기 카불 경찰청장이 말했다.
이 총격으로 카디르 부통령의 사위인 운전사도 사망했다. 아프간 전쟁 이후 카르자이가 이끄는 정부에서 각료 살해는 이번이 두 번째다. 2월에는 압둘 라흐만 관광교통장관이 이슬람 하지 순례를 앞두고 카불 공항에서 집단 폭행당해 숨졌다.
타지 모하메드 와르다크 내무장관은 “암살 동기는 아직 명확치 않다”며 암살범 검거를 위해 카불 전역에 검문소를 설치토록 지시했다. 공공사업부 청사 경비 10명은 사건 발생 중 대응을 하지 않아 괴한과 연루했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됐다.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은 카디르 부통령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을 방문한 뒤 비상 각료회의를 소집해 9일을 전 국민 애도의 날로 정했다.
이번 사건은 진통 끝에 탄생한 카르자이 정부가 출범 한 달도 안돼 맞은 최대의 위기다. 테러의 배경에는 중앙 정부의 각료 구성을 두고 갈등했던 아프간 내 최대 민족인 파슈툰족과 소수 타지크, 우즈벡족의 세력 다툼에다 파키스탄과 접경해 상거래가 활발한 낭가하르주의 지방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군벌들의 알력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아프간 내 최대 아편 재배지의 하나인 낭가하르주의 아편 카르텔이 새 정부 출범 이후 실시된 아편 통제 정책에 불만을 품고 암살을 감행했을 가능성에 비중을 두고 있다. 카디르는 3월에 잘랄라바드 외곽의 대규모 아편 시장을 대대적으로 단속해 현지인들이 적지 않은 불만을 품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직후 각국 정상들은 카디르 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 암살 배후를 강력 비난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아프간 정국 안정을 위한 우리의 의지는 어느 때보다 강하다”며 암살범 수사에 적극 협력할 의향을 밝혔다. 영국 독일 프랑스 정부도 사건의 배후를 비난하면서 임시 정부가 혼란을 수습해 조속히 안정을 회복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아프간 새 정부는 물론 아직 전쟁 수행 중인 미국 주도의 연합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가뜩이나 민족 다툼이 심한 중앙 정부에서 카디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권력 타툼의 재연이 분명한 데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허술한 틈을 타 지방의 군벌 다툼도 심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최근 미군의 오폭으로 증폭된 반미 분위기에다 내부 권력 다툼에 휘말린 카르자이 정부의 지원이 약해질 경우 연합군의 작전 수행에도 적지 않은 제약이 따를 전망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피살 카디르는 누구
6일 암살당한 하지 압둘 카디르 아프가니스탄 부통령은 아프간 내 최대 종족인 파슈툰족 명문가 출신의 대표적 군벌이다.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아프간 재벌로 과거 민영 항공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카디르는 1980년대 대소 항전을 이끈 무자헤딘(이슬람 전사)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92년 소련군 퇴각 후부터 탈레반 집권 직전인 96년 9월까지 동부 낭가하르 주지사를 지냈다.
탈레반 집권 후 독일로 망명했으나 3년 만에 돌아와 아프간 접경 파키스탄 도시 페샤와르에 거점을 두면서 북부 판시르 계곡의 북부동맹군에 가담해 반 탈레반 무장 투쟁을 벌였다.
지난해 10월에는 그의 형이며 대 소련 저항 투쟁으로 이름을 떨친 압둘 하크가 파슈툰족 저항군을 조직하기 위해 아프간 남부에 잠입했다가 탈레반에 붙잡혀 처형당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탈레반 정권 몰락 즉시 카디르는 잘랄라바드로 돌아와 주지사에 복귀했다. 카불 함락 후 국내 언론으로는 처음 단독으로 아프간에서 현장 보도한 본지 기자 역시 100여 명의 외신기자들과 함께 이때 카디르의 인도를 따라 아프간에 진입했다.
아프간 과도 정부 수립을 위한 정파 회의에 파슈툰족 대표로 참석했던 카디르는 지난 달 열린 로야 지르가(종족 대표자 회의)를 통해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발탁의 배경에는 카디르가 지방에서 실권을 행사할 경우 중앙 정부의 권위가 약해질 것이란 우려가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김범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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