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ㆍ카드사 출신 보험사 사장, 증권ㆍ투신사 출신 은행장, 생명보험사 출신 손해보험사 사장, 손보사 출신 생보사 사장….다양한 금융 영역을 넘나들며 경력을 쌓은 ‘멀티플(multiple) 최고경영자(CEO)’들이 최근 금융권에서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들 멀티플 CEO들은 보수적인 기존 조직과, 금융권역간 칸막이를 파괴하면서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기존 조직을 다이내믹하게 변신시키고 있는 주인공들이라는 것. 동원증권 사장 출신으로 멀티플 CEO의 원조격인 김정태(金正泰) 국민은행장은 “은행은 고여있는 물이고, 증권사는 흐르는 물”이라며 수행비서 폐지, 발탁인사, 본부의 팀제 운영, 스톡옵션 정착 등 은행의 보수적 관행을 일거에 변화시켰다.
LG투신운용 사장 출신의 이강원(李康源) 외환은행장은 4월 신임 행장에 내정됐을 때만해도 ‘은행 경력이라곤 전혀 없는, 그것도 중소형 투신사 사장이 대형 시중은행 CEO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겠냐’ 는 곱지 않은 시선이 많았지만 두달만에 이를 잠재우며 은행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금융권중에서도 상품특성ㆍ직원성향 등 모든 면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보험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씨티은행 출신으로 서울은행 부행장을 거친 교보생명 장형덕(張亨德) 사장은 5월 취임직후 “타석에서 볼 넷을 기다리는 것은 헛스윙보다 더 나쁘다”며 생보사 서열 2위에 안주하는 직원들을 질타했다. 장 사장은 대고객업무를 30분 앞당기고, 불필요한 제도를 없애는 ‘제도파괴위원회’와 아이디어 뱅크인 ‘청년이사회’라는 독특한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경제기획원 과장(행시 13회), 한국자동차보험(현 동부화재) 상무, 동양카드 사장 등을 역임한 동양생명 구자홍(具滋弘) 사장은 보험업계의 대표적 멀티플 CEO.
그는 ‘광고할 돈이 있으면, 설계사 성과급을 지급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임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생보업계 최초로 ‘수호천사’라는 상품 브랜드를 내놓아 1999년 창사 최초로 흑자를 기록한 데 이어 3년 연속 흑자를 내고 있다.
럭키생명 사장 출신으로 지난달 LG화재 사장으로 취임한 구자준(具滋俊) 사장도 “이기는 기업문화를 만들어, 업계 2위 자리를 굳히겠다”며 손보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이들 멀티플 CEO들은 금융권내 다른 부문에서 갈고 닦았던 노하우를 적극 이용, 금융권역간 벽이 허물어지는 환경변화에 한발 앞서 대응하고 있다.
교보생명 장 사장은 지금까지 카드사와 은행의 영역이었던 대출전용카드제도를 도입, 소비자금융을 강화하고 있고 5월 신한생명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한동우(韓東禹) 전 신한은행 부행장은 “보험사의 자산운용이 은행에 비해 너무 허술하다”며 자산운용의 일대 혁신을 추진중이다.
동양생명 구 사장은 “금융환경 급변으로 앞으로 금융회사 CEO는 증권ㆍ투신의 빠른 판단력과 날렵한 조직력, 은행의 다양한 금융기법, 보험의 중장기적인 전략수립 능력 등을 모두 갖춰야 한다”며 “특정분야에만 탁월한 CEO는 조직을 유지할 수는 있어도 발전시킬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유병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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