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7월5일 연세대 경영학과 학생 이한열이 서울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에서 숨졌다. 21세였다.이한열은 그 해 6월9일 ‘6ㆍ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의 유해는 7월9일 광주 망월동 묘역에 묻혔다.
그 해 1월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아 숨진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과 함께 이한열은 1987년 6월 항쟁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박종철의 죽음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었다.
항쟁은 6월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로 시작됐다. 그리고 7월9일의 ‘애국학생 고(故)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은 항쟁의 뒤풀이였다고 할 수 있다. 스물 갓 넘어 죽은 박종철이나 이한열의 이름 뒤에는 더러 ‘열사(烈士)’라는 말이 붙는다.
그들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박종철이나 이한열이 그 시대의 별난 젊은이는 아니었다.
전두환 군부의 폭압 정치는 한 세대의 젊은이 다수를 잠재적 열사로 만들었다. 그것이 그 시대의 불행이었다.
전국적 시민 항쟁의 물결을 감당하지 못해 6월29일 당시 집권당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인 뒤,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숨을 쉬기 시작했다.
노태우는 비록 군인 출신 정치인이기는 했으나 대통령이 된 뒤 조심스럽게 민주화의 시동을 걸었다. 5년 뒤 김영삼은 31년만의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 되었고, 다시 5년 뒤 김대중은 광복 뒤 첫 평화적 정권 교체의 주인공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15년 전이라면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 자유에는 박종철과 이한열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피가 배어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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