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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이후] (4)이젠'문화 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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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이후] (4)이젠'문화 강국'이다

입력
2002.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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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은 초유의 자발적인 국민적 축제문화를 만들어냈다.붉은옷을 입은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온 기운은 그 어떤 기존 문화의 형식으로도 갈무리하기 어려운 한국적 신명의 문화를 우리 자신과 세계에 보여줬다.

당초 한ㆍ일 월드컵은 아시아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자는 ‘문화 월드컵’이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개막식 행사로 뚜껑을 연 ‘문화 월드컵’의 예정된 기획들은 길거리 응원으로 표출된 신명의 문화에 가려 초라함만을 드러냈다.

월드컵은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새로운 한국적 문화의 광장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보여줬다.

‘문화 월드컵’으로 준비된 연극 음악 무용 등 다채로운 공연이 전례없는 홍수를 이뤘지만, 질적으로 수준이 들쭉날쭉한데다 전시용의 날림성 행사도 많았다.

외국인에게 우리 문화를 보여준다는 취지는 대외적 명분일 뿐 대부분의 행사가 내수용으로 그쳤고, 상당수가 관객 동원에도 실패했다.

전국적으로 수백 건의 크고 작은 문화행사가 ‘다이내믹 코리아 페스티벌’이란 이름으로 펼쳐졌다. 행사명에 ‘월드컵’을 표기하려면 세계축구연맹(FIFA)의 승인을 받아야하는데, 승인 조건이 워낙 까다로워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별칭을 쓰는 편법이었다.

하지만 월드컵 문화행사 중 클래식 공연의 최대 이벤트였던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와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 부부 초청공연조차 표가 전체의 60% 밖에 안팔렸다.

한국과 이탈리아의 8강전이 있던 날 열린 부천필의 말러 교향곡 시리즈. 평균 1,200석 이상 표가 팔리던 것인데, 이날은 관객 숫자가 절반에도 못미치는 450여 명에 그쳤다.

매년 가을 따로 열리던 서울무용제와 서울연극제를 통합해 지난해 재출발한 서울공연예술제의 경우 올해는 월드컵에 맞춰 행사 기간을 일부러 앞당겨 치렀다가 준비 부족에 따른 지지부진한 성과에 만족해야 했다.

김덕수의 사물놀이 한울림이 6월 내내 하려던 한전아츠풀센터의 국악 상설공연은 관객이 너무 없어 보름만에 중단됐다. 대학로의 연극들은 한국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길거리 응원까지 겹쳐 관객 발길이 뚝 끊어짐에 따라 아예 공연을 취소하기도 했다.

월드컵 특수는 커녕 월드컵 때문에 망했다는 소리가 나오는 판이다. 사실 이는 어느 정도 우려됐던 바이기도 하다.

1년 전 월드컵에 맞춰 문화행사를 준비하자는 얘기가 나올 때부터 월드컵 기간에는 어떤 공연을 해도 관객 모으기 힘들 것이다, 차라리 그 기간에는 극장 문 닫는 게 손해 덜 보는 길이라는 소리까지 있었다.

실제로 이번 월드컵에 맞춰 대형 공연을 주최했던 한 공연장 관계자는 축구 열기가 하도 뜨겁다 보니 공연 보러 오라고 하는 게 꼭 죄짓는 기분이었다고 토로했다.

공연계의 문화 월드컵은 계속 살아남아 사랑받을 좋은 작품을 남기지 못한 채 요란한 빈 수레로 끝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형 국가 행사에 맞춘 일회성 뷔페식 성찬보다는 두고두고 먹을 양식을 준비하는 차분함이 아쉽다.

음반업계도 사상 유례없는 불황에 시달렸다. 새 음반은 물론 팔리는 음반이 없었다. 대회 직전 쏟아져 나온 6, 7장의 월드컵 기획 음반들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니뮤직에서 발매한 두 장의 월드컵 공식 음반은 10만 장을 겨우 넘었고 조수미가 부른 ‘챔피언스’가 실린 유니버설 뮤직의 기획 음반 ‘빅토리’도 워너뮤직에서 발매한 조수미 베스트 음반과 겹쳐 실리면서 4만여 장 팔리는데 그쳤다. ‘2002 사커 페스티발’ 등 국내외 유명 가수들의 노래를 모은 각종 컴필레이션 음반은 판매가 더 저조했다.

업계에서는 월드컵 기획 음반의 부진을 예견된 일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장 주된 요인은 역시 내용 부실 때문이다.

미국 가수 아나스타샤가 부른 ‘붐(Boom)’은 물론, 로컬 버전 공식 음반에 수록된 브라운 아이즈, 케미스트리 등 한ㆍ일 4팀이 함께 부른 ‘렛츠 겟 투게더 나우’나 god의 ‘트루 이스트 사이드’는 각각 랩과 R&B 노래로 월드컵과 응원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한 축구팬은 “아무리 들어도 신이 나지 않고 따라 부르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오히려 윤도현 밴드가 부른 단순하고 강렬한 ‘오 필승 코리아’가 음반에 수록되지도 않았는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순식간에 온 국민의 노래가 됐다.

월드컵이라는 행사의 성격과 그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가수의 지명도와 국내 가요계의 유행 경향만을 의식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월드컵 관련 음반을 발매했던 음반사의 한 관계자도 “한국이 4강까지 오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대부분의 음반사가 기획 등 준비가 철저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반짝 특수를 노리고 그저 “월드컵이니 이런 것도 한번 해보자”는 전시성이 강했다는 것이다.

홍보의 문제도 컸다. 월드컵 기간 내내 아나스타샤의 ‘붐’은 어디에서도 쉽게 들을 수 없었다. 공식 주제가임에도 TV에서는 ‘붐’이 아니라 다른 노래들이 흘러 나왔다.

KBS와 MBC는 각각 조수미의 ‘챔피언스’와 클론의 ‘발로차’를 자체 공식 응원가로 정하기까지 했다. ‘발로차’는 MBC의 의뢰를 받아 만든 곡이고 ‘챔피언스’는 유니버설 뮤직이 KBS에 로열티를 지급하기로 계약이 되어 있다.

자연히 타 방송사의 응원가를 피하는 것은 물론, 다른 월드컵 관련 노래도 방송을 탈 기회가 적어졌다. 소비자들로서는 노래에 대한 인지도도 떨어질 뿐더러 월드컵을 상징하는 기념물로서의 의미도 반감될 수 밖에 없다.

음반업계의 한 관계자는 “만일 방송 3사에서 한 노래를 공통으로 틀었다면 대박이 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 88서울올림픽 때는 코리아나가 부른 ‘손에 손잡고’가 방송 3사의 전폭적인 지지로 음반이 꽤 나갔고 공동 개최국인 일본에서는 ‘렛츠 겟 투게더 나우’가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또 외국인에게 우리 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문화 월드컵’을 만든다는 대외적 명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음반은 물론 공연에서도 외국인을 겨냥한 홍보나 마케팅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대중음악평론가 송기철씨는 “상업적 성공을 위한 내수용 음반보다는 오히려 우리 음악을 알릴 만한 음반이 많이 나왔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월드컵 기간 중 한국을 찾은 외국 관광객들이 들을만한 기획 음반이라고는 외국의 재즈 뮤지션들이 ‘뱃노래’ ‘고향의 봄’ 등을 연주한 ‘조선지심’ 정도 뿐이다.

월드컵이 한국 축구에 단지 1회성 행사가 아니듯, 문화 또한 마찬가지다. 오래도록 살아 남아 국민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음반,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음악과 문화를 알려줄 훌륭한 공연과 이를 알리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없다면 ‘문화 월드컵’은 한낱 요란한 빈 수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프랑스 축구를 일컫는 이름인 ‘아트 사커’는 사실 축구 플레이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1998년 월드컵을 주최한 프랑스의 문화예술의 힘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월드컵으로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진 지금, 이제라도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즐길 수 있는 양질의 다양한 문화 상품을 만들려는 노력이 잇달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김지영기자

koshaq@hk.co.kr

■"광장을 문화개방구로"

미리 계획한 월드컵 문화 행사들의 성적표는 초라하지만 길거리 응원이 자연스럽게 국민 대축제로 발전한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소중한 경험이다. 이를 일상으로 끌어들여 ‘스스로 찾아서 즐기는 문화’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포스트 월드컵 문화사회 만들기’ 운동에 나선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는 새로운 놀이문화 창출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로 교육과 축제문화의 개혁을 꼽았다.

길거리 응원을 축제로 이끈 주축은 10~20대 젊은이였다. 이동연 문화연대 청소년문화위원장은 “입시에 찌든 청소년의 문화적 잠재력을 해방시킬 새로운 문화교육을 통해 국민 모두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위원장은 우선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지역 예술가단체 등과 연계한 문화 통합교육 시범교실을 운영하고, 점진적으로 전 학교로 확산시켜 나갈 것을 제안했다.

그는 “학연 지연 등을 배제한 ‘히딩크식 경영’은 학교 교육에도 적용돼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자녀들을 입시지옥에 내모는 학부모들의 인식 전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정희 시민자치문화센터 소장은 “길거리 응원이 축제로 승화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라면서 “당장 관 주도의 지역문화축제를 지역민이 주인이 되는 잔치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임 소장은 또 축제문화 개선을 위해 지역별로 월 1회 차량 2부제를 실시, 거리문화를 활성화하고 ‘청소년 동아리 한마당’과 같은 청소년 축제, 길거리 전시와 라이브 공연, 생활체육 프로그램 등을 확대해나갈 것도 제안했다.

이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공연장이나 전시장 등 특정 공간과 지역에서만 향유할 수 있는 문화가 아니라, 광장에서 함께 모여 즐기면서 자생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문화의 창출이었다. 월드컵은 이런 축제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계기였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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