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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16)소설하 현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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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16)소설하 현기영

입력
2002.07.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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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현기영씨문학을 숙명처럼 생각해온 나는 문학 이외의 다른 삶을 살아볼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참혹한 유년을 겪은 자는 어려서 문학을 만나면 곧장 그 길로 들어서기 쉽다는데, 아마 내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나 보다.

반세기 전 내 고향 제주를 가공할 재앙불로 초토화시킨 4ㆍ3의 대참사는 어린 나의 뇌리에도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내 몸을 얽어맨 채 좀처럼 떠나지 않던 우울증과 지금의 이 나이에도 이따금씩 찾아오곤 하는 실어증도 그 참혹한 유년에서 기인한 것이다.

내가 술을 좋아하게 된 것도, 그래서 지금은 빼도 박도 못할 모주꾼이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당장 된장국에 빠질 것 같은 우거지상을 하고 있다가도, 술만 들어가면 비 개인 듯 사물이 밝게 보이고, 실어증의 굳은 혀도 나긋나긋하게 풀어져 기분좋게 다변스러워지는데, 어떻게 음주를 마다할 수 있겠는가.

술의 공덕인지는 몰라도, 이제 나는 매력적인 시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우울증 - 멜랑콜리의 우아한 분위기를 오히려 부러워할 정도로 낙천적이 되어 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나에게 덮씌워진 그 우울증에서 벗어나려고 꽤나 애를 썼던 일들이 생각나는데, 아마도 우울증이나 슬픔이 성장에 해롭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혼자 있으면 우울해지기 일쑤여서, 늘 동무들 가운데 끼어 있기를 좋아했다.

내면이 억압되어 말을 더듬었던 동무들과 얘기하며 놀 때면 주로 듣는 편이었지만, 몸 부딪치며 뛰어 놀 때면 말 더듬는 답답함을 벌충하려는듯이 천방지축 그야말로 ‘천둥번개에 개 뛰기’로 날뛰곤 했다.

충동적이고 난폭한 몸놀림 때문에 목숨을 잃을뻔한 적도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얻은 생채기 흔적이 지금도 몸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뉘가 있는 밥을 먹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혹시 돌을 씹을까 봐서 떠듬떠듬 조심해서 입을 놀려야 하는데, 그때의 답답함이 바로 말더듬이의 답답함일 것이다.

어떻게든 이 답답한 어눌함에서 벗어나 보려고 책을 소리내어 읽어보기도 하고, 혓바닥과 턱 운동도 해보곤 했지만, 별 효험이 없었다.

중1 때는 학교에서 주최하는 이야기 대회에 그 오죽잖은 언변을 가지고 나가는 만용을 부렸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중1 때 처음 만난 문학은 나에게 지옥에서 만난 부처님의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말 대신에 글을 택하기로 작심했다.

문학은 내 기질에 잘 맞았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내면의 억압 현상 때문이었는지, 나는 권위주의적인 어른들을 비정상적일 정도로 두려워했고, 두려운 만큼 증오했다.

학교 교사들은 물론 아버지도 두려움과 미움의 대상이었는데, 고2ㆍ고3 때는 각각 교련 교사와 군 장교 출신인 아버지의 억압적 권위에 도전하는 한판의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그것은 나의 억압된 내면의 비정상적인 폭발일 수도 있지만, 집안 내림의 격렬한 기질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기질 면에서 아버지를 많이 닮았고, 할아버지는 한 술 더 떠 일제 때 일본 오사카(大阪)의 노동판에서 왜놈들과 싸워 이긴 싸움꾼이었다.

평소에는 얌전히 처신하다가도 간질 발작처럼, 본능이 시키는 것처럼, 문득 문득 고개를 쳐드는 사나운 격정, 저돌적으로 몸을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 그러한 나 자신이 나는 얼마나 두려웠던가.

이 저돌적 파괴 본능은 남을 공격하지 못하면, 그 대신 자신을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고3 때 있었던 두 번의 자살 기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억압적인 가부장 밑에서 자란 아이는 나중에 반항아가 되기 쉽다고 한다.

아무튼 문단 데뷔 직후 나는 유신 정권의 폭정 속에서 제주 4ㆍ3을 소재로 한 세 편의 중단편 소설들을 잇달아 쓰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것이 나의 못된 성미가 제법 옳게 쓰여진 단 한 번의 예일 것이다.

이렇게 권위주의를 싫어하고 예속을 싫어하다 보니, 내 기질에 맞는 것은 결국 문학밖에 없었다. 문학은 자유 혹은 해방과 같은 말이 아닌가.

말하자면, 나는 억압된 나의 내면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문학을 택한 셈이었다.

비록 성의 문제라 할지라도, 우리의 내면 정서가 억압된 섹스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면, 그 성을 해방시켜 주어야 옳지 않은가.

나는 성을 다룬 시ㆍ소설이 미학적으로 옳기만 하다면, 공적 영역에서도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제주도민의 대다수가 앓고 있는 집단 콤플렉스인 4ㆍ3은 나의 내면 정서의 억압이기도 했으므로, 그 억압을 풀어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이 문학 정신일진대, 4ㆍ3의 억압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풀지 않고서는 문학적으로 단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을 것 같았다.

4ㆍ3의 슬픔은 순수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감미롭기조차 한 애잔한 슬픔이 아니라, 피와 비명과 떼주검의 무서운 고통의 슬픔이다.

도전적인 그 세 편의 소설은 즉각 유신 정권에 의해 보복을 당했다. 만약 그 모진 매질의 고문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곧 경쾌하게 4ㆍ3 소재를 떠나 순수문학의 지경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 고문자들은 저승의 염라대왕처럼 무서웠기 때문에, 내가 죽어 저승에 가면 혹시 염라대왕이 생시의 그 고문자들처럼 왜 그런 글을 썼느냐고 추궁하면서 고문하지나 않을까 하는 착각이 생기곤 한다.

유신 권력의 핵이 암살당할 무렵에 그러한 필화를 입었던 나는 그 이듬해까지 포함해서 거의 1년 반 동안 내내 울분과 절망 속에서 펜대를 꺾은 채 술로 허송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한 여인이 나타나서 절망의 무게에 짓눌려 나자빠져 있는 나에게, 어서 일어나라고 무섭게 야단치는 생생한 꿈을 꾸었다.

그 여인은 내가 작품 속에서 창조한 순이 삼촌이었다. 그때 나는 가공의 인물인 그 불행한 여인이 나의 분신으로서 나의 내면에 살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 내가 소설 쓰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변신의 매력이다.

소설가는 자기 자신이라는 하나의 아이덴티티에 만족하지 않고, 여러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자기 자신 속에 가지려 하는 자이다.

소설가는 변신을 거듭하면서 수많은 작중인물들을 창조해 낸다. 작중 인물은 작가의 분신이면서 동시에 별개의 존재이기도 하다.

아무튼, 자기 자신의 삶 외에도 다른 여러 사람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소설가의 특권인데, 나 또한 그러한 특권을 누릴 수 있어 행복하다.

예컨대 나의 내부에 거주하는 캐릭터들 중에는 노예 신분에서 용약 민중의 지도자로 부상하여 프랑스 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이재수라는 청년이 있는데, 그의 궐기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늘 기분이 좋다.

“소인이 비록 미천한 노예라 할지라도, ‘옳을 의(義)’ 자를 위해 죽지도 못합니까? 외적과 난신적자를 토멸하는 데 어찌 반상(班常)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나는 먼 과거 속의 인물들은 나름대로 만들어 봤지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대 소비 사회의 소비자로서의 인물은 아직 만들어내지 못했다.

소비 사회의 한가운데 서서 자신의 환경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인물로 변신해 보는 것이 내 꿈인데, 그게 나로서는 여간 어렵지 않다.

작가의 변신은 독자의 변신 욕구에 부응한 것이다. 독자들은 감정 이입을 통해 작중 인물과 동일시함으로써 변신을 꾀한다.

그리고 독자가 작중 인물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그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사회적 책임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독자의 천박한 취향에 영합한 베스트셀러 통속문학이,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순수문학의 이름으로 행세하는 세상이다.

통속문학이 비판되지 않으면, 사회의 가치 체계는 전도되게 마련이다. 한국인들은 똑같은 책을 보고, 똑같은 화면을 보고, 똑 같은 사고를 한다고 말해도 그리 과언은 아닐 것이다.

베스트셀러들은 대개 상투적인 이야기에 가짜 해결, 혹은 너무도 손쉬운 해결, 상처에 마약 바르기 식의 해결이기 쉽다. 회의하고 질문하는 문학, 요컨대 사고하는 문학이 너무도 드물다.

지금의 소비 사회는 인간을 끝없는 소비 욕망의 포로로 만들어 놓고, 늘 새로운 감각, 새로운 쾌락을 좇아 다니게 한다.

상품에 저항하여 인간에게 소비 대신 사고를 되돌려 주는 문학,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본래대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그러한 문학을 나는 꿈꾼다.

●연보

▲1941년 제주 출생

▲1967년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

▲1967~88년 서울사대부중·고,고척고 교사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버지'당선 등단

▲1989년 초대 4·3연구소장

▲2001년 작가회의 이사장

▲단편집 '순이 삼촌''아스팔트'마지막 테우리'장편 '변방에 우짖는 새''바람타는섬''지상에 숟가락 하나'등 ▲신동연창작기금(1986) 만해문학상(1990)오영수 문학승(1994) 한ㄱ구일보문학상(1999)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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