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유 레디?(R U ready?)’ 같은 영화는 규모의 경제가 기본이다.총제작비 80억원의 이런 영화는 자본의 규모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상상력을 화면으로 옮길 컴퓨터그래픽 등 영상 인프라가 구축되어야 시도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한국영화의 비약적인 시장확장이 없다면 기획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인 윤상호 감독의 ‘아 유 레디?’는 액션사극 ‘무사’, SF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예스터데이’ 와는 또 다른 판타지 영화.
‘쥬만지’ ‘해리 포터’ 등 할리우드 판타지물과 일단 ‘아이디어’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게 우선 과제이다.
사파리 관람차가 곰에게 습격 당하며 이상한 건물로 숨어 든 6명.
아무런 인연도 없던 이들은 “당신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아드립니다. 아 유 레디?”라고 적힌 현판을 읽자 환상의 공간으로 빠져든다.
베트남 전에서 악몽에 시달린 황 노인(안석환)이 과거 전장에서 주저했던 자신과 마주한 후, 적의 총알에 맞는 것을 본 사람들은 ‘아 유 레디’가 바로 마음 속 자신의 악몽과 마주하는 ‘환상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안다.
외과의사 유강재(김정학)는 생선가게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자친구에게 모욕당하고 손목을 칼로 그은 고교시절의 자신과 부딪치고, 사파리의 동물연구원 단주희(김보경)는 아들을 낳기 위해 목숨을 포기한 어머니와 그렇게 태어난 동생을 방안에 가둔 자신과 마주한다.
삐딱한 고교생 정현우(이종수)와 모범생 봉준구(천정명)는 늪에 빠져 목숨을 잃기 직전 우정을 회복한다. 소년 맹찬희(박준화)는 악몽을 먹고 사는 인형을 통해 고아 소년의 외로움을 달랬다.
‘쥬만지’ ‘인디아나 존스’ 등 미국의 어드벤쳐 영화가 놀이공원에라도 온듯한 즐거운 환상속으로 관객을 인도하는 대신 이 영화는 6명의 사연과 치유과정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바로 이 점에서 대자본 상업영화의 균열은 시작됐다. 사연은 많고 판타지는 적다. 환상은 공간의 이질성만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태국의 오지 상크라부리에서 HD 카메라로 촬영한 화면은 때때로 독특한 감각을 선사하지만 이야기 구도는 너무 리얼하다.
판타지 어드벤쳐 영화는 시공에 대한 접근방식이나 위기를 풀어나가는 해법을 새롭게 찾아야 한다. ‘미이라’ 가 무명 배우로도 성공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
‘아유 레디’ 역시 스타 대신 새 얼굴로 진용을 꾸렸으나 판타지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인간을 습격하는 쥐 떼, 바위산에서 떨어져 내리는 엄청난 돌더미, 고딕풍 저택은 컴퓨터그래픽의 발전을 보여 줄 뿐이다.
관객이 몰입도 하기 전에 효과음으로 공포 분위기를 유도하는 대목이나 주인공의 캐릭터가 하나같이 암울한 것도 못내 아쉽다.
영화 후반부 단주희와 유강재의 과거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도 연출의 결함.
인물에 복잡한 과거를 옭아매고도 판타지물로서 재미를 줄 수 있었다면. 할리우드를 능가하려던 시도는 결국 따라하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낳았다. 12일 개봉.
박은주기자
jupe@hk.co.kr
■'아 유 레디?' 작가 고은님
‘아 유 레디?’의 스타는 주인공도, 감독도 아니다. 작가 고은님(31)이다.
방송작가를 하다 지난해 데뷔작 ‘번지점프를 하다’로 백상예술대상, 대종상에서 각본상을 수상하면서 충무로에서 인기 있는 시나리오 작가로 떠올랐다.
영화가 시나리오 작가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도 이례적인 일. ‘번지…’의 시나리오료 대신 제작사인 눈엔터테인먼트 직원으로 1년간 월급을 받았지만, 영화가 성공하면서 창작이사가 됐고, 영화사 지분도 가졌다.
이번 영화의 시나리오료도 국내 최고 수준인 3,000만원.
“한 사람에게 2시간씩 준다면 그들의 아픔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을 텐데 6명의 이야기를 1시간 30분 안에 녹여넣는다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는 그는 “각 캐릭터에 아픔과 성격을 주고 나서 영화 속에서 스스로 해법을 찾았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나 있는 비밀스런 악몽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것이 그의 의도.
“처음에는 ‘쥬만지’나 ‘해리포터’ 같이 될 것 같았는데 쓰다 보니 진지해져 한국인의 정서는 역시 ‘한(恨)’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번지 점프…’때는 “진짜 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아니다.
4,000명의 ‘번사모’( ‘번지점프를 하다’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을 위한 시사회를 따로 마련할 만큼 그들이 든든한 ‘빽’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실망하지 않을까 겁도 나고 걱정도 된다.
벌써 눈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할 다음 영화인 이현세 만화의 ‘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를 각색해 놓았고, 30대 부부가 주인공인 뮤지컬 ‘오블라디 오블라다’의 각본도 마쳤다.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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