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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이야기] (11)미륵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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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이야기] (11)미륵사지

입력
2002.07.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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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彌勒寺址)는 백제시대 최대의 사찰 터다.삼국유사는 무왕(武王ㆍ600~641)이 왕비와 함께 행차하던 길에 용화산 밑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현출하자 왕비의 청으로 연못을 메우고 이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절터에 일부가 허물어진 채 남아있는 국보 11호 미륵사지 석탑은 현존 최고(最古)의 석탑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나는 1980년 가을 미륵사지 조사단의 보조원으로 ‘땅꾼’(발굴 전문가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 세계에 첫 발을 디뎠다.

그 후 부여문화재연구소장으로 부임해 96년 조사를 마무리하기까지 세차례에 걸쳐 무려 13년을 미륵사지에서 보냈다.

고향에서 보낸 어린 시절보다 더 긴 세월을 함께 한 그곳은 내게 또 하나의 고향이다. 그래서 “전생에 나는 미륵사의 중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곤 한다.

13년 세월이 모두 기억에 생생하지만 보조원 시절이 가장 잊혀지지 않는다.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어깨 너머로 일을 배웠는데 발굴로 드러난 건물의 흔적과 유물들을 도면에 옮기는 일이 나의 주된 임무였다.

발굴 전 미륵사지는 대부분 논과 밭이었다. 1,300여 년에 걸쳐 수십 ㎝에서 두텁게는 4~5m까지 쌓인 퇴적토를 걷어내자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가장 많은 것이 기와였다.

‘미륵사’ 등 글자가 새겨진 명문기와만도 4,000여 점이 출토됐다.

백제에서 통일신라, 고려, 조선까지 전 시대에 걸쳐있는데다 일반 기와, 막새(와당ㆍ瓦當), 용마루 끝을 장식하는 치미 등 종류도 다양해 그야말로 ‘기와 백화점’이라 할 만했다.

나는 하루 수백 점씩 출토되는 기와를 정리하는 일을 도맡으면서 기와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모양새, 문양 따위를 꼼꼼히 기록하고 어설픈 솜씨로 그린 그림을 붙들고 씨름하느라 해 저문 뒤 현장에 홀로 남아있기 일쑤였다.

그래도 우둔하기 짝이 없는 이런 방법을 고집한 덕에 지금도 절터 어느 곳, 어느 정도 깊이에서 어떤 문양의 기와가 어느 시기 유물과 함께 출토되었다는 것이 바로 떠오른다.

이 때의 소중한 경험이 오늘까지 땅꾼의 삶을 이어올 수 있게 한 힘이 되지 않았나 싶다.

발굴 규모가 워낙 커 인부를 많을 때는 50~60명씩 썼는데 대낮에 술 마시고 그늘에 숨어 쉬는 인부들이 적잖아 관리에 애를 먹었다.

한번은 한 인부가 발굴 트렌치(구덩이) 속에 빠진 독사를 잡아먹으려다 물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문공부장관 등의 행차도 잦았는데 조사단원들이 단복까지 맞춰 입고 도열해있는 모습은 군대 사열을 연상케 했다.

암울한 시대의 한 단면이지만 당시엔 ‘촌지’ 얻어 회식하는 재미에 마냥 기쁘기만 했다.

요즘도 발굴 현장에 가면 기와 조각들이 “나는 백제 때 만들어졌소” 하고 말을 거는 것만 같다.

혹여 직원들이 청승맞다고 놀릴까봐 애써 외면하지만 그 바탕이야 어디 가겠는가. 맹자가 이르되 선비는 ‘항심(恒心)’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이제는 그런 항심을 가질 때도 됐음직한데, 직원들 제쳐놓고 종이와 연필을 쥐고 달려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고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최맹식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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