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대학의 같은 과 같은 학번 동창들끼리 서로 사는 얘기들을 주고받는 학번 홈페이지가 있다.그 곳에 지난해 말부터 부쩍 나이 타령이 늘었다. 사회 생활을 시작한 지 서너 해 쯤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긴 그 어떤 열패감과 절망이 ‘서른’이라는 나이와 겹쳐지면서 다들 쓸쓸해지는 모양이었다.
사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30대의 고뇌, 30대의 무게, 30대의 변화 등등 조금은 먼 선배들의 몫처럼 들어왔던 것들이 고스란히 내 몫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득해진다.
누군가는 나이 먹는 일이란 무언가를 조금씩 포기해 가는 과정이라고 비유했고, 내가 아는 선배는 나이 먹는 일이 다만 갈수록 지루하고 창피스러울 뿐이라고 했다.
나이에 관한 이런 저런 얘기가 많지만, 확실한 것은 수학적인 나이와 마음의 나이가 서로 화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척이나 안타깝게도. 수학적인 나이는 한 해 지나면 하나 더 커지고, 또 한 해 지나면 어김없이 하나 더 커져 있지만, 그것에 걸맞은 그릇이랄까 마음의 크기랄까, 인격의 성장이랄까 뭐 그런 것들은 결코 그 숫자에 따라 누적적으로 무언가를 쌓아가지는 않는 것 같다.
열 아홉 때는 내가 가고 싶은 대학에 들어가면 내 고민의 반은 해결될 줄 알았고, 또 대학 4학년 때는 내게 맞는 직업을 택하고 나면 내 고민의 90%는 또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런데 서른이 된 나는, 그 고민의 순수성과 치열함이 다소 희미해져 있을 뿐, 지금도 스무 살 시절의 ‘그러니, 나는 이제 무엇이 될까’라는 물음을 여전히 던지고 있다.
‘난 언제나 나이에 걸맞은 삶의 무게를 살아내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들지만 달리 생각하면 재미있는 추억도 떠올려진다.
아주 어렸을 때는 교복을 하얗게 다려 입고 사뿐히 지나가는 동네 누나만 보아도 반은 어른인 것처럼 느꼈고, 대학 신입생 때는 우수에 젖어있는 고학번 선배들만 보아도 ‘아아 저쯤만 되어도 세상 이치를 반은 헤아리고 살 거야’ 하는 생각에 부풀었다.
입사 직후에는 5년 차, 10년 차 선배들을 보며 “저 사람들도 나처럼 헤매며 살까”라는 생각에 그들을 부럽게 쳐다봤다. 언젠가 나도 후배들에게 한 치 빈틈도 없는 선배의 모습으로 비춰지리라 다짐하면서.
그러나 어쩌면 세상 이치를 반은 헤아린다거나 헤맬 거리조차 없어진다거나 하는 그런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서른 살의 무게, 어쩌면 그런 건 애초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마흔은 불혹(不惑)이라고 하지만 그 무엇에도 미혹되지 않는 인생이 있을까.
설령 쉰 살이 되고 예순이 되더라도 제 나이의 무게에 자신감에 차 살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예순 살, 어쩌면 일흔 살이 될 때까지 그저 최선을 다해 방황하고, 최선을 다해 ‘이건 아닌데’ 생각하고, 또 최선을 다해 ‘그러니 이제 나는 무엇이 될까’를 생각하는 미욱한 모습, 그 자체로 아름다운 모습이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힘이 생긴다.
김영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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