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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신화] (10)창조와 치유의 여신 '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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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신화] (10)창조와 치유의 여신 '여와'

입력
2002.07.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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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동안 주로 중국 남신들의 특성과 활동에 대해 살펴 보았다. 남신들은 아무래도 패권 다툼과 그로 인한 전쟁, 힘겨루기 등을 즐겼고 영웅적인 업적과 관련해서는 괴물퇴치, 모험, 살육 등의 행위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 중국 여신들의 세계를 탐색하면서 그들의 특성과 활동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아보기로 하자.중국 여신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위대한 존재를 손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여와가 될 것이다. 후한(後漢) 시대의 학자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책에서는 여와를 두고 태고의 신성한 여인으로서 만물을 만들어낸 존재라고 하였다.

아울러 동진(東晋) 시대의 도인 갈홍(葛洪)이 지은 ‘포박자’(抱朴子)에서는 여와가 땅에서 출현하였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견해들을 종합해 보면 여와는 대지모신(大地母神)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창조신임을 알 수 있다.

땅은 농작물을 비롯 만물이 생겨나고 자라는 터전이기 때문에 신화에서 흔히 어머니와 같은 여신 곧 모신(母神)으로 간주되었다.

여와의 창조 행위 중에서 가장 저명한 것은 이미 말했듯이 흙을 반죽하여 사람을 빚어낸 일이다.

일설에 의하면 여와가 정성들여 빚은 사람은 부귀한 인간이 되고 노끈에 흙물을 묻혀 휘둘러서 생긴 사람은 비천한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후세의 계급 관념이 스며든 것으로 신화 본연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창조신인 여와가 인간만 만들었을 리가 없다. 일설에 의하면 여와는 정월 초 하루에 닭을, 이틀째 되는 날에 개를, 사흘 째 되는 날에 양을, 나흘째 되는 날에 돼지를, 닷새째 되는 날에 소를, 엿새째 되는 날에 말을 만들고, 이레 째 되는 날에 사람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드레 째 되는 날에는 일반 곡식을, 아흐레째 되는 날에는 조를, 열흘 째 되는 날에는 보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창조의 과정은 구약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곡식과 날짐승, 길짐승을 닷새에 걸쳐 미리 만들어 놓고 엿새째 되는 날에 사람을 만든 후 이레째 되는 날 쉰 것과 비슷하여 흥미롭다.

그러나 ‘창세기’에서는 만물이 다 이루어진 후 최후로 인간의 창조가 이루어지고 그와 동시에 인간으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하여 만물을 지배하라는 하느님의 축복이 내림으로써 강력한 인간 중심의 관념을 표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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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와신화속 에코페미니즘

여와의 경우는 비록 인간이 가축 다음에 창조되기는 하나 인간 이후에도 곡식이 창조됨으로써 인간이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비쳐지지는 아니한다.

그렇다면 인간 다음에 곡식이 창조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마 그것은 수렵이나 목축보다는 훨씬 뒤늦게 찾아온 농업 행위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와는 인간을 창조한 후 계속해서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결혼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였다. 여와는 남녀를 짝 지워 결혼하도록 도와주는 중매인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대가 끊어지지 않고 불어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여와를 결혼의 신으로 숭배하였는데 특별히 고매(高妹)라는 신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고매는 신성한 중매인 곧 결혼의 신이라는 뜻이다.

고매신의 사당은 성 밖에 건립되어 있었고 해마다 봄이 되면 태뢰(太牢)라는 융숭한 의식으로 신께 제사를 드렸다. 태뢰란 소 양 돼지의 세 가지 제물을 바치는 큰 제사이다.

이때 사당에서 제사만 드리는 것이 아니었다. 선남선녀들이 사당 주위에 모두 모여들어 축제를 벌였고 서로 눈이 맞으면 숲속 적당한 곳에서 무슨 짓을 해도 괜찮았다.

아마 격렬한 춤과 음악이 뒤따랐을 젊은이들의 이 흥겨운 축제는 사실상 오르기(orgy)와 같은 상태에 이르렀을 것이고 이러한 오르기의 잔치는 원시시대의 군혼(群婚) 혹은 잡혼(雜婚)의 습속을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고매신 곧 여와는 이와 같이 남녀간의 결합만 주선한 것이 아니었다. 자식 없는 사람들도 고매신의 사당에 와서 빌어 자식을 구하고자 하였다.

여와의 몸체는 본래 뱀이었으나 남녀간의 성적 결합을 주관하는 신의 기능 때문인지 후세에 인간화되어 에로틱한 매력을 발산하는 여신의 모습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명(明) 나라 때의 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를 보면 은(殷)의 폭군 주왕(紂王)이 사냥길에 여와의 사당에 들렀다가 요염한 여와의 화상(畵像)을 보고 음탕한 마음을 품었다가 여신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는 대목이 있다.

인간의 창조와 남녀간의 결합, 생식을 주관한 일 이외에도 여와에게는 중요한 능력이 또 한가지 있다. 그것은 치유와 보완의 기능이다. 아득한 태고 시절 갑자기 자연의 균형이 깨지는 큰 천재지변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회남자’(淮南子)에 의하면 어느날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일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불길이 맹렬히 치솟고 거센 물살이 덮쳐오는 등 하늘과 땅 전체가 변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험악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안정되게 살아갈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맹수들이 사람을 잡아 먹고 사나운 날짐승들이 노약자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자신이 창조한 인간이 이러한 불행을 겪는 것을 자비로운 여신 여와는 내버려 두지 않았다. 여와는 우선 불행의 원인인 파괴된 하늘과 땅을 원상으로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와는 오색빛깔 나는 넓은 돌을 잘 다듬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늘의 뚫린 구멍을 기웠다. 다음으로는 꺼져 버린 땅의 네 귀퉁이가 문제였다.

여와는 거대한 자라 한 마리를 잡아 네 발을 잘랐다. 그리고 그것들을 사방 땅 끝에 세워 땅을 떠 받치도록 했다. 이렇게 하니 무너졌던 하늘과 꺼져버렸던 땅이 본래의 안정된 모습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겨우 한숨을 돌렸으나 아직도 맹수들이 날뛰고 있었다. 여와는 맹수 중에서 가장 흉악한 검은 이무기를 잡아 죽였다. 그랬더니 맹수들이 점차 진정되기 시작하였다. 여와는 갈대잎을 태운 재로 넘쳐나는 물을 막았다.

이제야 온 천지의 재앙이 사라졌고 사람들은 다시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회남자’에 의하면 따뜻한 봄, 더운 여름, 서늘한 가을, 추운 겨울의 사계절이 전처럼 순환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안락하고 흥겨운 분위기에 젖어 짐승들과 동고동락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신 여와의 노력에 의해 인간은 유토피아의 시절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일을 이룩한 후 여와는 응룡(應龍)이라는 날개 돋친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구름속을 지나 높디 높은 하늘 나라로 초연히 떠나갔다 한다.

그렇다면 인간을 창조하는 힘, 부서진 하늘과 땅을 고치는 힘 등 여와의 이러한 능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옛 기록에 의하면 여와는 하루에 70번이나 변화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 언젠가는 여와의 창자가 10명의 신으로 둔갑한 적도 있었다.

변화의 천재인 여와, 그러니 이 세상에서 그녀가 못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여와의 몸체가 뱀이라는 이야기도 여와의 뛰어난 변화의 능력을 상징한다. 뱀은 허물을 벗을 때 마다 항상 새로운 몸으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여신 여와는 마치 제우스의 아내였던 헤라처럼 여신 중의 여신이라 할 만하다. 헤라 역시 결혼과 가정의 수호신이라는 점에서도 양자는 일치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와 신화의 경우 두 가지 점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한 가지는 여와가 행했던 모든 일들이 그녀 단독으로 수행한 것이라는 점이다. 여신 여와의 이러한 모습은 인류 초기의 여성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후세에 이르러 가부장적 관념이 침투하여 여와는 오빠이자 남편인 복희(伏羲)의 반쪽인 종속적인 존재로 격하되어 그려진다. 또 한가지는 여와의 업적으로부터 추리할 수 있는 여성의 생산적이고 치유적인 본능이다.

남신들의 파괴적인 성향과 대비되는 여신 여와의 이러한 특성은 여성의 원초적인 능력으로서 한정적으로 재인식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와신화속 에코페미니즘

여와신화는 최근 대두된 여성학의 유파인 에코페미니즘의 입장에 대해서 풍부한 근거를 제공해줄 수 있다. 에코페미니즘은 생태주의와 여성학을 결합하여 인간의 자연에 대한 파괴, 남성의 여성에 대한 억압을 가부장 문화의 동일한 산물로 본다.

환경 문제를 여성에 대한 착취와 똑같은 차원에서 비판, 고발하며 태고의 여성, 신화 속의 여신에서 가부장제에 오염되지 않은 여성의 원형을 발견하고자 한다. 여와는 에코페미니즘이 재발견해서 알려야 할 원형적인 여성인 셈이다.

우레의 수레를 타고 천상으로 사라진 여신 여와의 모습은 지금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중국의 민간에서는 여와낭낭 이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 숭배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흔한 유물에서 그녀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시골 어디든지 가면 볼 수 있는 옛 비석, 그 중에서도 신도비(神道碑)라고 하는 큰 비석을 보면 비신(碑身)을 등에 업고 엎드린 거북이가 있다.

이것은 거북이가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모습을 상징한 것인데 이러한 이미지는 바로 여와가 자라의 네 발을 잘라 꺼진 땅을 받쳤던 신화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글=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그림=서용선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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