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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현실 읽기] (7)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의 개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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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현실 읽기] (7)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의 개략'

입력
2002.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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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나이든 사람은 살기 어려운 세상이라고 한다. 인터넷 시대의 도래 이후 더 그렇게 느낀다. 나이든 사람이 시대에 뒤처지는 일이야 늘상 있어 왔지만 오늘날 들어 그 간격은 더 아득해지고 있다.삶의 미덕에 대한 평가도 차츰 변화하고 있다. 배려, 예의바름, 공손함, 신중함 따위보다는 솔직함, 자유로움, 활발함, 유쾌함 등이 더 가치 있는 자질로 높여지는 인상이다. 전반적으로 어른들의 삶의 방식보다는 젊고 어린 사람들의 행동 방식에 후한 점수를 준다.

여기서 ‘아이’와 ‘어른’의 차이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굳이 단순한 연령상의 수치를 따지자는 뜻은 아니다. ‘애 같다’와 ‘어른스럽다’는 판단은 애초부터 나이와는 무관한 말이다.

물론 그 차이란 여러 가지겠다. 그렇지만 좋거나 옳다고 해서 그렇게 살 수만은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다양한 경로를 두루 용인하는가 여부에 따라 그 차이를 판단해 볼 수도 있다. 그 괴리를 견뎌내는 힘과 여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두고 어른스럽다고 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자신의 진짜 바람과 겉으로 드러난 행동의 불일치 사이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버텨가는 방식에서 어른스러움을 떠올린다. 이런 사람이 투명하거나 솔직할 리는 없다. 이런 성향의 한 가지 극단적인 형태는 ‘어쩔 수 없음’을 수락하는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하는 삶이 보여주는 빛나는 투명함도 아름답지만, 어쩔 수 없음의 세계를 용인하고 그 간격을 견디는 공력과 고투에도 탄복할 수 있다. 솔직히 나로서는 후자를 더 존중한다.

‘문명론의 개략’(1875)에서 울리는 일본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ㆍ1835-1901)의 목소리는 내게 어른의 목소리로 들린다. 문명이란 이름으로 서구 세력이 밀려들었다. 문명이란 이름의 ‘서양’을 마주 대하며 어떤 결단을 내려야 했다.

후쿠자와는 문명이란 지선(至善)이 아니라 선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일 뿐이며, 진보의 순간순간을 일컫는 것이라 했다. 건강하다고 해도 병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듯이 문명화되었다 하여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문명은 대세였고,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세계의 교류가 나날이 빨라지고 서양문명이 동양으로 전파되어 그 이르는 곳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할 것 없이 모두 감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양문명이 온 세계를 정복하는 일은 피하기 힘든 형세였다. 동양의 민족은 저항할 만한 힘이 없었다. 도쿄 사람이 나가사키로부터 번져온 홍역을 치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라고 후쿠자와는 생각했다.

유일한 선택은 문명을 이로움으로 전환시키는 노력일 것이다. 후쿠자와는 다양한 수사학을 사용하면서 문명에 이르는 방법은 하나가 아님을 역설한다.

어떤 화살을 쓰건 표적을 맞추는 것이 목적이듯, 강이 어떤 모양으로 흐르건 결국 바다로 모여들듯, 어떤 제도를 어떻게 활용하여 ‘안락과 품위의 진보’를 이룰지는 저마다 놓인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가 자칫 외부에 대한 침략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비난도 옳고, 방편적인 상황론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옳다. 그렇지만 후쿠자와의 생각이 자리한 그 맥락과 조건을 벗어나서 후쿠자와와 대면하는 일은 ‘어른스럽지’ 않다.

생각과 주장의 정당성은 그 내적 논리뿐만 아니라 현실적 조건을 함께 고려할 때야만 획득될 수 있다. 언제나 맞는 말만 하는 사람은, 언제나 맞는 말만 해도 되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 참된 사상은 그 괴리를 내포하기에 언제나 결핍과 균열을 지니게 된다.

옳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표현하는 것 사이의 거리를 자각적으로 끌어안을 때 ‘어른’이 된다. ‘운명’이 있다면 그것은 어른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어쩔 수 없음’은 거기서만 자각되기 때문이다.

요즈음처럼 세상이 투명하거나 투명해야만 한다는 ‘아이’들의 소리만 요란해서는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명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문명이 아니어도 좋다. 그래도 난 문명주의자다”라고 변환할 수 있는 후쿠자와의 언명은 여전히 힘이 있다. 우리에겐 더 많은 ‘어른’이 필요하다.

/류준필

성균관대 대동문화 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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