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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529)都有浩

입력
2002.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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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7월1일 고고학자 도유호가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1982년 몰(歿). 도유호는 한국 근대 고고학의 초석을 놓은 학자다.해방 뒤 그의 학문 활동이 북한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극소수 학술 논문을 뺀 남한 출판물에서는 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가 선사시대와 고대사 연구에서 이룬 업적은 남북의 고고학계가 함께 인정하고 있다.

1963년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에서 구석기 유적 발굴을 지휘하고 관련 논문들을 통해 10여만 년 전 한반도에 구석기 문화가 존재했음을 이론적으로 입증한 사람이 도유호다.

도유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과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철학 역사학 선사고고학 민속사 등을 공부했다.

빈 대학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문화적 연관 속의 한국사 문제’다. 그는 히틀러 정권에 의해 잠시 투옥됐다가 석방돼 귀국했고, 해방 후 경성대학에서 가르치다 월북해 김일성 대학 교수가 되었다.

북한 고고학의 제1세대를 이끈 것은 도유호와 체코 프라하 대학 출신의 한흥수다. 두 사람 다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한흥수가 주로 추상적 이론 중심의 논문을 썼던 데 비해 도유호는 고고학적 발굴에 기초한 실제 중심의 논문을 써 대조적이었다고 한다.

도유호는 1959년에 ‘고구려 석실 봉토분의 유래와 서역문화의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고구려의 고분 문화가 서역과 무관치 않음을 주장했는데, 그의 이 주장은 뒷날 우즈베키스탄의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에서 고구려 고분의 것과 같은 사신도가 발견돼 그 정당성을 획득했다.

도유호는 1960년대 초 북한 학계에서 뜨겁게 전개된 고조선 강역에 관한 논쟁에서 고조선의 중심을 랴오허(遼河)라고 본 주류 학설에 맞서 그것이 평양이었다고 주장한 뒤 학계의 변두리로 밀려났다고 전한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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