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휘몰아치는 민주화의 격랑에 여장을 풀 겨를도 없이 휩쓸렸다.유학 동안 나는 계속 해뜨는 동쪽을 바라보며 돌아가면 그림을 못그리는 한이 있더라도 민주화를 위해 목숨이라도 던지겠다고 다짐했던 터였다.
무서운 불길이었다. 전율의 나날이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나를 잡아둘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 힘으로 돌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속에서 미하일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도서출판 빛샘 등 발행)을 만났다. 홍명희의 ‘임꺽정’도 당시 함께 읽었지만 나는 ‘고요한 돈강’이 더 좋았다. 둘 다 금서의 목록에 들어있던 책들이다.
‘고요한 돈강’은 나를 엄청난 상상의 공간으로 끌고 갔다. 유럽 여기 저기를 대충은 다 여행했었지만 당시는 아직 러시아를 갈 수 없었기에 더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활자 하나하나에 감각기관을 설치해 놓은 것처럼 예민하게 반응했다.
안개 낀 돈강, 범람하는 돈강, 전쟁 소용돌이 속의 돈강, 애절한 비련의 돈강, 끊임없이 흐르고 흐르는 세월의 돈강.
나는 돈강에 표류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자궁 속에 품긴듯 포근히 잠들기도 하며 끝없는 상념에 상념을 키우며 책에 빠져 들었다.
조국애에 달 뜨기도 하고 혁명에 뛰어들기도 하며, 나의 현실과 책 속의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였다. 나는 돈강의 주인공이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와의 싸움이 치열해지면 질수록 나는 더 돈강에 빠져 들었다. 분량이 길었기 때문에 며칠간 일에 바빠 읽지 못하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한 인간이 역사 앞에 던져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엄숙한 순간이 사실은 늘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란 것을 돈강을 읽으며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나에게 역사적 순간이요 운명적, 숙명적 시간이 될 수도 있다고 느끼면서 말이다.
그 뒤 ‘고요한 돈강’은 내 그림의 스승이 됐다. 비록 그것이 소설이지만 그 느낌으로,그 감동으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가슴 깊이 새겼다. 대서사시와 같은 작품을 그리겠다고.
/임옥상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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