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동란이 터지고 사흘 뒤인 1950년 6월28일 새벽 2시30분께 인민군의 남진 속도를 늦추기 위해 국군 공병 부대가 한강 대교를 폭파했다.당시 한강에는 인도교인 한강 대교와 광진교, 경인선 상행 및 하행의 단선 철교 그리고 경부선의 복선 철교 등 모두 다섯 개의 교량이 있었다.
새벽 4시에 폭파된 광진교를 포함해 이 다리들은 이 날 새벽에 모두 파괴됐다. 날이 밝기 전까지 다리가 끊긴 줄 모르고 달리던 수많은 차량이 물 속 깊숙이 잠겼다.
6월26일 13시에 의정부를 점령한 인민군 제1군단은 우이동-창동 방어선과 회기동-미아리 방어선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28일 오전 1시에 서울 시내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한강 다리 폭파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이뤄졌다.
인민군은 다리가 파괴된 당일 낮에 서울 전역을 장악하고 중앙청에 인공기를 게양했다.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된 것이다.
한강 다리가 폭파될 무렵 국군의 주력은 한강 이북에 있었기 때문에 다리가 파괴되면서 퇴로가 끊겼다.
결국 국군은 야전포와 차량을 비롯한 장비를 버리고 소총만 휴대한 채 나룻배를 타고 소부대 단위로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도하 작전은 지옥과도 같았다.
개전 당시 10만 여명에 이르던 국군 병력은 한강을 건너면서 2만5000여명으로 크게 줄었다.
한강 다리를 너무 이르게 파괴한 데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육군 고등군법회의는 1950년 9월15일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최대령은 21일 처형됐다.
채병덕 참모총장은 물론이고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의 재가 없이 한강교를 폭파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상식에 비추어보면, 이 재판은 속죄양 만들기였다.
1964년 10월23일 군법회의는 이 사건을 재심해 최대령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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