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네덜란드 로테르담일까. 로테르담에서 멀지 않은 독일의 함부르크나 하노버는 왜 허브항이 되지 못했을까.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가 아닌 싱가포르가 허브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초대형 항만과 공항없이 허브가 될 수는 없다. 하역ㆍ환적을 위한 대단위 물류시설과 거미줄 같은 육ㆍ철로도 허브를 만드는 핵심 인프라다.
하지만 이런 ‘하드웨어’는 돈만 있으면 짓는다. 돈 많은 해양국가라고 모두 허브가 되지는 못했다는 사실은, 하드웨어란 그저 허브의 여러 필요조건중 하나일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다. 첨단 인프라를 갖췄더라도 제도와 언어, 관행, 행정서비스, 국민의식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허브로 성공할 수는 없다.
네덜란드 국제물류협회(HIDC) 드 비트 한국과장은 “허브항구ㆍ공항이 허브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허브화해야 허브항만ㆍ공항이 작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프라 수준만 보면 우리나라도 충분한 동북아 허브감이다. 컨테이너 처리능력 세계 3위의 부산항외에 각각 25선석, 16선석 규모의 부산신항과 광양항이 건설되면 향후 10년간 동북아에 필적할 항구가 없다.
인천공항도 총부지 1,435만평 규모의 2단계 공사가 끝나면 홍콩 첵랍콕이나 싱가포르 창이공항을 압도할 전망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3시간이내 비행반경에 인구 100만이상 도시가 43개(인구 10억명)나 있을 만큼 배후시장도 광활하다.
하지만 허브의 소프트웨어는 아직도 낙제점이다. 허브가 되려면 단지 외국인전용공단이나 경제특구 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투자ㆍ교역의 해방구’가 되어야 하지만, 한국의 토양은 외국인과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기엔 여전히 폐쇄적이다.
우선 언어문제가 있다. 네덜란드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 구사능력이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나라이고, 싱가포르와 홍콩도 아시아에서 영어와 중국어 사용이 가장 자유로운 지역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언어장벽이 높은 나라다.
본지가 주한 외국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한국내 생활에서 가장 큰 불편사항으로 언어(66.7%)가 꼽혔고, 한국이 동북아 허브가 되기 위한 최우선 선결과제도 언어(61%)로 지적됐다.
의사소통이 안되는 곳에 투자할 사람은 없다. 동북아 중심국가가 되려면 영어와 중국어, 가급적 일본어까지 국민적 교육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둘째는 행정서비스다. 투자의 발목을 잡는 행정규제의 양은 줄었지만, 투자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의 마인드는 여전히 규제시대에 살고 있다.
평소에도 외국기업에 먼저 전화를 걸어 ‘불편한 것은 없느냐’고 묻는 공무원, 외국기업이 애로를 겪고 있다고 하소연할 때 직접 찾아가 고충을 해결해주는 공무원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
네덜란드 아일랜드가 ‘투자천국’인 까닭은 언제라도 ‘원스톱 출동서비스’를 제공하는 공무원들의 서비스 정신에서 쉽게 확인됐다.
전투적 성향의 노조, 높은 인건비와 임대료, 하다못해 도로 표지판의 엉터리 외국어표기까지 모든 것이 달라져야만 허브의 문턱을 넘을 수 있는 것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구축됐다 해도, 허브화 전략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화폐까지 통합된 거대한 배후시장을 가진 네덜란드나, 도시국가이기 때문에 제조업 대신 물류ㆍ금융중심 전략을 택한 싱가포르는 벤치마킹 대상은 될지언정, 결코 교과서는 아니다. 우리에겐 ‘한국형 허브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남덕우(南悳祐) 산학재단이사장은 이와 관련, “한 지역을 개발할 때 물류 비즈니스 금융중심기능을 수평적이고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해선 곤란하다”며 “우선 순위를 정해 어디에 자원을 집중할지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동북아 물류센터 건립 역시 부산 광양 인천 제주 목포 평택 등이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어, 자칫 정치적 지역안배 논리나 지자체간 과당경쟁 및 중복투자 우려가 높다는 것이다.
분단은 ‘허브 코리아’ 실현에 큰 장애물이다. 배후소비시장인 중국 및 시베리아 지역으로 연결되어야 할 육ㆍ철로 배송망이 휴전선에 의해 단절되어 있는 한 ‘반쪽 허브’밖에 될 수 없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허브 코리아 전략도 햇볕(햇볕정책)을 쬐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의 잠재시장인 동북아에서 허브를 꿈꾸는 나라는 우리만이 아니다. ‘허브 코리아’는 ‘허브 차이나’ ‘허브 재팬’ ‘허브 싱가포르’와 경쟁에서 이겨야만 실현될 수 있다.
네덜란드 투자청(NFIA) 예룬 라머스 서울사무소장은 “한국이 허브로 성공하려면 일본보다 더 접근이 용이하고(accessible), 중국보다 더 예측가능하고(predictable), 홍콩ㆍ싱가포르보다 더 넓은 시장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문제는 시간과의 싸움"
‘지정학적 조건은 동북아 최고. 그러나 다른 나라와 비슷한 속도로 항만ㆍ공항 시설, 배후 단지를 개발하다가는 다 뺏긴다. 상하이(上海)항, 푸동공항이 체계를 갖추기 전에 물류를 선점해야 한다.’
동북아 물류 거점이 된다는 것은 한국을 환적(煥積) 화물(국내에서 다른 배나 항공기로 옮겨 다시 3국으로 향하는 화물)의 집하지로 만드는 것.
환적화물은 화물을 내려서(하역료), 보관한 뒤(보관료), 다시 싣는(선적료) 등의 수익을 동시에 얻게돼 수출입화물보다 부가가치가 훨씬 크다.
지정학적으로만 보면 한국의 입지조건은 동북아 최고다. 부산항과 광양항은 세계 컨테이너선 주요 간선 항로상에 있고, 인천공항은 동아시아에서 재급유없이 논스톱(non-stop)으로 미주ㆍ유럽 운항이 가능한 몇 안되는 도시중 하나다.
북한과 철도가 개통되면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중국횡단철도(TCR) 등과 연결돼 러시아 몽고 중앙아시아 등에까지 배후권역이 확대될 수 있다.
최근 중국경제가 부상하면서 부산항에 전 세계 환적화물이 쇄도하고 있다. 올 1~5월중 부산항의 환적화물은 138만9,000TEU(전체 물동량의 40%)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 급증했다.
이중 60%가 중국행· 중국발 화물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전망하는 부산ㆍ광양항의 미래는 아슬아슬하다.
한진해운 장섭(張燮) 부산항 지점장은 “환적화물 증가는 중국의 항만 여건이 아직 열악하기 때문이지, 부산항의 시설이 우수해서가 아니다”며 “상하이항이 계획대로 시설을 확충하는 수년뒤면 다 뺏길 수 있다”고 말했다.
부산항의 경우 지난해 홍콩 싱가포르에 이어 세계 3위의 컨테이너항만으로 올라섰지만, 기본 인프라에서는 아시아 주요 항만보다 열악하다.
2만톤급 대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컨테이너 부두는 21선석으로 싱가포르(41선석), 일본 고베항(37선석), 대만 카오슝항(27선석), 홍콩(22선석)에 못미친다.
더욱이 현재 18선석인 상하이항이 2010년 추가로 52선석을 개발하면 부산항의 역할은 줄 수 밖에 없다.
한국해양대 이철영(李哲榮) 교수는 “정부는 2011년까지 25선석을 추가 건설할 계획이지만, 상하이항 개발속도에 비하면 늦다”며 “시설 확충을 서두르고, 국내외 선사(船社)들에게 과감한 인센티브를 주는 등의 조치를 통해 물류를 선점하지 않으면 정부 계획이 공염불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더 큰 문제는 우리나라가 길만 빌려주고 있을 뿐 그 이상의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싱가포르나 상하이는 이미 배후에 각각 130만평, 300만평 등의 배후지를 관세자유지역으로 조성해 보관, 포장, 가격표 부착, 조립, 생산 거점으로 종합 물류단지화하고 있다.
정부는 부산 구(舊) 항만 배후 40여만평을 올해초부터 관세자유지역으로 지정했지만, 관세를 면제한 것이라곤 새로 교체한 터미널 장비 뿐이다.
물류센터도 없이 관세자유지역으로 지정해놓아 선사들이 환적화물 컨테이너의 뚜껑을 열고 싶어도, 부가할만한 서비스가 없다.
DHL이나 UPS 등 세계적인 항공운송업체들은 수익의 95%를 포장과 라벨부착 등에서 올리고 있지만, 인천공항에서는 배후단지가 없어 단순 운송만 할 뿐이다.
교통개발원 예충열(芮忠烈) 박사는 “항만이나 공항 서비스수준 등 소프트웨어는 괜찮다. 문제는 항만ㆍ공항시설과 배후단지 건설을 정부 계획보다 앞당겨, 동북아 물류를 선점하는 것”이라며 “지체하다가는 상하이와 대만 등에 모두 뺏기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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