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스페인 월드컵의 슬로건은 ‘스페인은 달라지고 있다(Spain is Different)’였다.프랑코 총통의 40년 권위주의 통치를 종식시킨 스페인으로선 월드컵을 통해 어두운 ‘독재국가’에서 건강한 민주ㆍ산업국가, 투우의 힘과 플라멩코의 낭만을 맛볼 수 있는 문화ㆍ관광국가로 변신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스페인의 이미지 변신은 성공적이었다. 외면했던 자본과 사람이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은 82년 5,380달러에서 92년 1만4,160달러로 늘어났고, 같은 기간 관광수입은 62억달러에서 204억달러로 확대됐다.
▼한국을 보는 새시각
2002년 한국의 변신은 훨씬 더 드라마틱했다. 그라운드에서도, 관중석에서도, 길거리에서도 모든 것이 경이적이었다. 한국은 이번 월드컵을 통해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다이내믹 코리아’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월드컵 이전까지 한국은 이미지 부재의 나라였다. 그나마 알려진 이미지라면 부정적인 것이 전부였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월드컵 직전 국내 진출한 113개 외국계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의 이미지 설문조사 결과, ‘이미지 자체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응답이 40.7%로 가장 많았고 부정적 이미지는 31.0%, 긍정적 이미지는 28.3%에 불과했다.
한국에 대한 연상이미지 역시 남북대치(40.6%) 6ㆍ25전쟁(8.9%) 부패(5.1%) 정치사회혼란(4.4%) 등 부정적 상징들이 절반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6월 한달 동안 한국을 보는 세계의 눈은 완전히 달라졌다. 미국 경제통신사 다우존스(22일자)는 “월드컵은 한국에게 세계적 주자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고립됐던 과거를 떨쳐내는 무대가 됐다”고 보도했고,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24일자)도 “한국사회와 경제에 새롭게 활기와 신뢰가 형성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축구 대표팀의 선전에서 시작된 해외의 ‘코리아’ 재평가 움직임은 경제 사회 문화 국민의식 등 한국 사회 전반의 역동성으로 확대되는 분위기다.
관건은 이 같은 이미지 개선이 실질적 변화로 이어질 것이냐는 점이다. 꿈틀대는 ‘다이내믹 코리아’의 징후들이 실질적 ‘업그레이드 코리아’ ‘밸류 코리아’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월드컵 열기는 달아오른 것 보다 훨씬 빨리 식어버릴 수도 있다. 88올림픽 이후의 재판이 될 가능성도 크다는 얘기다
▼경제성장의 새 엔진
‘포스트 월드컵’의 수확을 거두는 작업은 우선 경제가 끌고 가야 한다. 94년 개최국인 미국은 월드컵이후 외자유치규모가 94년 451억달러→95년 588억달러→96년 845억달러로 늘어났고, 98년 주최국인 프랑스 역시 232억달러(97년)→295억달러(98년)→391억달러(99년)로 비약적인 외자유치성과를 거둬냈다.
그러나 86년 월드컵 유치후에도 주기적 외환위기를 겪었던 멕시코에서 보듯 월드컵 자체가 장밋빛 미래를 열어주는 것은 아니다.
동북아 중심국가(허브 코리아)를 지향하는 한국으로선 외자유치에 지금보다 더 좋은 타이밍은 없다. 월드컵이 만들어준 역동적 분위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세계적 신용평가기관인 피치는 우리나라의 국가등급을 2단계나 격상시켰다.
권오규(權五奎) 재정경제부 차관보는 “일본시장내 현대자동차의 인지도가 30%대에서 60%대로 높아지는 등 이미 기업의 브랜드 인지도는 가시적 개선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며 “특히 월드컵을 통해 하이테크가 꿈틀대는 IT강국으로서 면모도 확인되고 있어 금명간 외자유치의 가시적 성과가 나타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면 된다(can-do)’ 이데올로기도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외환위기 극복이후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못한 채 정체의 늪에서 헤매고 있는 한국경제로선 월드컵을 통해 도약의 자신감을 확인했다.
다만 목적이 수단과 과정을 정당화하는 70년대식 ‘하면 된다’가 아닌, 2002년의 ‘하면 된다’는 질서와 투명한 과정을 전제로 목표를 달성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를 부여할 만 하다.
▼사회통합의 시작
월드컵은 대내적으로 사회적 패러다임의 변화도 촉발시킬 수 있다. 스페인은 82년 월드컵에서 개막전은 바르셀로나, 결승전은 마드리드에서 개최하는 지역안배를 통해 뿌리깊은 지방간 대립감정을 치유했고,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바스크 무장단체(ETA)까지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는 98년 월드컵에서 알제리계의 지단, 뉴칼레도니아 출신의 가랑뵈, 가나계인 드사이 등 ‘다인종 대표팀’으로 우승을 일궈냄으로써 이민족ㆍ인종에 대한 ‘톨레랑스(관용)’를 통해 국민통합을 드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도 빈부ㆍ지역ㆍ노사ㆍ세대 갈등이 월드컵을 통해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김주현(金注鉉) 현대경제연구원 부원장은 “반목과 냉소는 화합과 칭찬으로, 서구에 대한 폐쇄성과 콤플렉스는 개방성과 자긍심으로 바뀌게 됐다”며 “이젠 사회구성의 패러다임 자체가 네거티브에서 포지티브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 같은 변화가 지속될 지, 아니면 다시 과거로 회귀할 지 여부는 전적으로 정치적 리더십에 달려 있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붉은 에너지 담아낼 새 리더십 창출하라"
한국과 독일의 월드컵 준결승전이 열리던 25일,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광화문을 꽉 채운 인파를 보면서 “대통령 아들들 문제만 없었더라면…”이라고 탄식했다.
그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국민들의 열광과 단합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도, 도덕적 상처 때문에 이를 크게 담아내지 못하는 현실에 아쉬움을 토해냈다.
그의 한숨처럼 정부나 청와대가 거대한 ‘붉은 물살’을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부가 ‘포스트 월드컵’ 대책을 내놓는 등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뭔지 모르게 신바람이 나지 않는 분위기다. 그 이유는 리더십의 한 축인 도덕성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국민들 사이에는 흥분과 열기, 감동의 물결이 넘치고 있지만, 그 저변에 깔린 시대적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인식, 변신하려는 진지한 노력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위대한 한국’ 등 구호는 요란하지만, 적대적 대립의 정치 행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무한 정쟁의 대선 국면이 달라질 기미도 없다.
국민과 시대는 변화의 격랑 속에 있는데 이를 이끌어 갈 리더십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6ㆍ13 지방선거에서 투표율이 사상 최저였다는 사실은 국민의 기대에 정치가 못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한국일보가 24일 마련한 ‘월드컵 좌담’에서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88 올림픽 때 형성됐던 국민적 에너지가 정쟁과 노사갈등으로 한 풀 꺾였던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운영의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이 좌담회의 절실한 결론이었다.
리더십 부재에 대해 진지한 문제의식이 필요한 순간이다. 이와함께 어떤 리더십이 나와야 하느냐가 이 시대의 중요한 의문으로 떠오르고 있다.
새로운 리더십의 모색은 월드컵 기간 중 분출된 국민의 열정과 단합이 어떤 성격이었는가에 대한 성찰을 선행하는데서 찾아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미 수많은 분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 요체는 자발성, 긍정성, 포용성, 창조성이다.
과거 국민들의 집단화는 관제 집회나 독재, 권위 등에 도전하는 저항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집단화는 어느 누구의 조정 없이 스스로 이루어졌으며 적대해야 할 대상도 전혀 없었다. IMF 경제위기 때의 금 모으기 운동처럼 생존을 위한 처절한 단결도 아니었다.
분열과 갈등, 위기의식은 없었고 통합만이 존재했다. 특히 우리 문화에 보기 힘들었던 축제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이런 현상에 대해 ‘단군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는 비유가 나왔으며 ‘초개인적인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조형된 역사적 순간’(서울대 김상환 철학과 교수)이라는 진단도 있었다.
따라서 새 리더십은 수백만이 한 마음으로 모인 역사적 현장의 본질을 담으면 된다. 그 리더십을 용어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분열과 갈등, 대립과 적대, 폐쇄성 등 과거 한국정치가 보여준 퇴행적 특징들의 반대개념이 돼야 할 것이다.
통합성과 개방성, 포용력 그리고 국민들 사이에 형성된 자신감을 묶어낼 수 있는 비전의 제시 등이 새로운 리더십의 기본 조건들이라 할 수 있다. 정치권과 지도층 엘리트들의 깊은 각성이 절실하다.
특히 다가올 대선 국면에서 각 정파가 변화의 흐름에 맞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승부를 해야 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지적된다.
또 한 차례의 지역감정과 분열주의가 판을 치는 과거로 돌아갈 경우 지금의 국민적 에너지는 혐오와 외면의 나락으로 가라앉게 될 것이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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