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결승 진출은 좌절되었지만 6월 한달 동안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코리언들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흥분과 감동, 자부심과 전율을 느꼈다.4강전에서 독일에 졌지만 누구도 선수들을 탓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 국민의 소망을 이미 이루어주었기 때문이다.
월드컵 때마다 실망감을 안겨주고 4년 후를 기약하자는 공허한 중계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남의 축제에 들러리만 서 왔던 한국 축구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
이들이 유럽 팀만 만나면 주눅이 들어 엄청난 스코어 차로 참패를 거듭하던 바로 그들이었다는 말인가?
이번 월드컵은 우리에게 거스 히딩크 감독의 탁월한 지도력과 선수들의 의지와 노력이 결합한 결과를 잘 보여 주었다.
특히 히딩크 감독의 리더쉽은 앞으로 우리 국민의 잠재력을 어떤 방식으로 끌어올릴 것인가를 시사해 준다.
충분한 이유와 목표가 주어지고 훌륭한 지도자가 있다면 최선을 다해 그것을 이루어 내는 능력과 의지가 우리에게 있으며, 또 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과정을 즐긴다는 것이다.
사실 100년 전에도 히딩크처럼 이 땅에서 고문관을 지냈던 사람들이 있었다. 아직 근대국가의 운영이 미숙한 대한제국이 초청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부 각 부처의 고문을 지내거나 신식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보면 늘 관리직을 맡고 있는 한국 관리들의 방해, 부패와 무능을 지적하고 있으며 고종의 리더쉽 부족을 아쉬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에 그들은 한국인들의 총명함과 의지력,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결국 리더쉽과 정치력의 부재가 한국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다 보니 조선이 근대적인 일본의 보호, 나아가 식민지가 되는 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생각까지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국 대한제국은 비싼 월급을 주면서 불러들인 고문관들의 효과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말았다.
또 이번에 처음 나타난 길거리 응원은 자칫 선수들만의 축제인 월드컵을 우리들의 축제로 승화시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발성에 기초한 공동체 문화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강제로 동원되거나 누가 강요해서가 아닌 자신의 즐거움에 따라 모인 사람들이 각각의 개성과 아이디어에 따라 모양을 내고 함께 즐기는 것이었다.
획일적인 교복을 입고 두발단속을 당하며 살아온 우리에게도 그렇게 기발하고 깜찍한 기지와 상상력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과거에도 우리 사회에 축제는 있었으나 늘 관 주도로서 독재와 파시즘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고, 동원되어 억지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은 축제의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었을 뿐이었다.
반면에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경험으로 1987년 6월 항쟁을 들 수 있으나 그것이 축제는 아니었다.
20세기는 과학과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인간을 개체화시켜 왔다. 거기에서 공동체란 민주주의의 적으로서 집단적 광기의 온상으로 배격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우리가 보여준 자발성에 기초한 공동체 문화, 이는 한국이 21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세계에 자랑스럽게 제시할 수 있는 주제가 되었다.
우리는 올림픽의 열기를 관 주도의 동원행사로 무산시켜 버린 1988년의 우를 다시 범해서는 안 된다. 월드컵을 치르면서 나타난 국민들의 열정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거나 상업적으로 이용해서도 안 된다.
또한 이 기회를 파시즘과 민족우월주의로 몰고 가거나 사회경제적 갈등과 모순을 은폐하고 무조건적인 화합을 강조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이번에 나타난 한국인들의 자발성에 기초한 공동체 문화를 키워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우리 정치와 언론 무엇보다도 교육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월드컵에는 통일 한국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세계 앞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통일 독일에게 분단 한국이 진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지나친 생각일까?
/주진오 상명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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