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6월26일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간경화증으로 작고했다. 향년 39세. 고유섭의 호는 우현(又玄)이다.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했다. 그 뒤 경성제대 조수를 거쳐 개성박물관장으로 일하며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전문학교에 출강했다.미술사학이나 미학이 ‘근대적’ 체계를 갖추어 우리 나라에 나타난 것은 이 말들이 한국어에 편입된 일제 때다. 그리고 한국 미학이나 한국 미술사학의 근대와 전근대를 가르는 마디는 고유섭의 학문적 삶과 대략 일치한다.
오늘날 한국의 미술사학, 미학, 미술 비평을 이루는 여러 줄기의 물살은 모두 고유섭이라는 수원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그는 자신의 당대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낯설었던 이 지적 영역에 처음으로 발을 딛으며, 후대의 학자들이 풀어야 할 공안을 자신의 논문 속에 응축시켜 놓았다.
그가 한국미의 특징으로 지적한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단아함’ ‘민예적 특성’ 같은 것은, 그러한 지적을 수용하든 비판하든, 지금까지도 한국적 아름다움의 탐색에 화두 역할을 하고 있다.
고유섭은 너무 짧게 살았다. 그러나 그는 개성박물관장 시절 뒷날 한국 미술사학의 주춧돌이 될 후학을 길러냈다. 고유섭은 당시 고등학생ㆍ대학생이었던 황수영, 진홍섭, 최순우 등과 전국을 답사하며 우리 고고학ㆍ미술사학의 기초를 다졌다.
고유섭의 개성 박물관장 시절과 그가 그 시절 맺은 사승관계 덕분에, 오늘날 한국 미술사학사에서 개성이라는 지명은 종가의 위엄을 내뿜고 있다. 중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자주 접하는 분청사기(粉靑沙器)라는 말은 1930년대에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미시마(三島)라는 용어에 반대해 고유섭이 새로 지은 분장회청사기(紛粧灰靑沙器)의 약칭이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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