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은 민족 공동의 적이 사라진 해방정국에서 좌와 우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으로 통일정부를 만들기 위해 백방으로 힘썼습니다. 그의 균형감각은 당장의 현실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역사는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빙그레 정수용(鄭秀溶ㆍ52) 사장은 최고경영자(CEO)의 자세와 기업의 활로를 의외로 백범 사상에서 찾았다. “단기적으로 실적을 내는 데는 강력한 추진력이 최고의 덕목이지만 하루만 살고 문닫을 기업이 아니라면 장기적인 비전과 추진력이 필요합니다. 이는 균형감각이 없다면 절대로 불가능할 일이죠.”
정 사장의 균형감각은 치고 빠지는 시점을 적절히 선택하는 데서 특별히 발휘됐다. 본사를 강남 압구정동 5층짜리 건물에 두고 있었던 빙그레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겪으면서 본사매각을 추진했지만 매각대금 문제로 5년 동안이나 질질 끌었다.
누구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지난해, 취임 1년이 채 안된 정 사장은 “장부상으로는 손해가 나도 장기적으로는 이익이 된다”는 단안을 내리고 바로 경기 남양주군 도농동 공장 건물로 본사를 이전했다. 매각대금 300억원이 빙그레의 재무구조를 개선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물론이다.
문제가 생기면 담당자를 부르는 대신 직접 해당 사무실을 찾아가는 등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만나는 것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정 사장의 노력이다. 본사는 물론이고 전국에 산재한 지사 직원들을 만나기 위해 한달에 한번씩 지역별로 돌아가면서 직원들과 산행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
그는 국내 CEO가운데 몇 안되는 언론계 출신이다. 1976년 합동통신(현 연합통신) 기자로 사회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80년 신군부의 언론통합폐 때 해직돼 언론계를 떠났다. 잠시 방황기를 거친 뒤 산업연구원으로 이적했고 도쿄사무소 발령을 계기로 일본 히도쓰바시대학에서 경제학 공부를 시작한 것이 빙그레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학교에서 김호연 빙그레 회장을 만나 92년 관리본부장으로 영입된 것. “사건현장을 발로 뛰며 자연스레 익혔던 기자시절의 균형감각이 기업경영에서도 큰 도움이 됩니다.”
정 사장은 직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꼭 ‘죄인이 되지 말자’고 강조한다. 생산활동을 통해 사회의 지속성을 유지해야 할 기업이 수익을 내지 못하면 그것은 범죄 이상의 죄악이라는 것이다. 본사를 남양주 공장으로 이전한 것도 비용을 줄이고 수익성을 높이자는 포석이었다.
수익창출을 위한 그의 신념은 사업 구조조정으로 이어졌다. 저수익 부문으로 남아있던 베이커리 체인사업인 썬메리를 삼립식품에 팔고 냉동만두와 초코케익 사업은 아예 폐기했다. 시장 지배력을 가진 빙과와 유제품을 핵심부문으로 살리기 위해서다.
이런 노력 끝에 지난해 영업이익률과 매출액 신장률이 크게 향상되고 IMF 당시 400%를 넘던 부채비율도 120%로 크게 개선됐다. 정 사장은 만성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 비핵심 부문인 라면사업에도 조만간 메스를 댈 작정이다.
하지만 식품업체라는 사업의 성격상 구조조정만으로 실적을 향상시키기는 한계가 있는 법. 현재 외형 6,000억원인 빙그레는 2005년에 매출규모 1조원으로 키우겠다는 정 사장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 규모를 키우면서 수익률도 더욱 늘리는, 이른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그가 내놓은 해법은 신규사업 진출과 해외시장 공략 두가지. 그러나 유제품과 빙과를 축으로 어떤 새로운 사업분야를 개척하고 어떻게 세계시장을 파고들지 아직까지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지는 못했다.
“임직원과 주변의 조언을 충분히 듣고 신중히 판단한 다음에 실천에 옮길 것”이라는 정 사장의 포부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 주목된다.
●92년 한화그룹서 분리 유름료 주력업체
바나나우유와 닥터캡슐, 요플레 등을 주력으로 하는 유음료 업체로 40여 업체의 난립 속에 12%의 시장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유제품 빙과시장에서는 투게더, 메로나 등의 브랜드로 점유율 25%. 전통 브랜드의 안정적인 매출을 바탕으로 지난해 신규 브랜드로 유음료 ‘5n’과 아이스크림 ‘메로나’를 출시하고 실적향상을 노리고 있다. 한화그룹 계열사로 있다 92년 분리해 독립경영 중이다.
독립 이후 계열사 및 비주력 사업부 매각과 압구정동 사옥 매각 등 지속적인 구조조정과 다각도의 수익성 개선 노력으로 분리 당시 1,000%에서 이르던 부채비율을 지난해 130%대로 낮추었다.
재무구조 개선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에 남은 과제는 신규사업을 통한 실적의 개선. 식품업계 가운데 유일하게 냉동, 냉장, 상온의 온도대별 유통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건강보조식품 등 다양한 사업분야로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여름철 주력제품의 판매호조와 신제품 출시로 안정적인 외형성장이 기대된다는 게 증권가 등의 평가. 그러나 매출의 60% 이상이 성수기인 4~9월에 집중되어 있어 계절적 기복이 심한 점은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정수용 사장은
▦1950년 충북 충주 출생
▦68년 경기고 졸업
▦76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합동통신 입사
▦81년 산업연구원 연구원
▦90년 한양유통 유통연구소 소장
▦92년 ㈜빙그레 관리본부장
▦2000년 ㈜빙그레 대표이사 사장
●가족관계 및 취미
▦부인 차덕희(51)씨와 1남1녀
▦취미: 골프, 등산
김정곤기자
kimj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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