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외국기업 CEO 83명 설문조사주한 외국기업 최고경영자(CEO) 10명 중 4명 이상은 우리나라가 동북아 허브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제시한 관건은 정부가 추진중인 물류 확충이나 경제특구 설립이 아닌 언어장벽과 높은 조세부담 해소. 하드웨어적 혁신 보다도 소프트웨어의 개선이 더 절실하다는 메시지다.
23일 한국일보가 주한미상공회의소(AMCHAM)와 유럽상공회의소(EUCCK) 회원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는 동북아 허브를 꿈꾸는 한국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향후 비전을 제시한다. 조사는 6월5~20일 CEO급 83명을 대상으로 이뤄졌으며 여론조사기관 미디어리서치가 분석을 맡았다.
▼투자환경 크게 개선됐다
주한 외국기업인들은 한국의 투자환경이 외환 위기 이전보다 크게 개선된 것으로 평가했다. ‘많이 좋아졌다’(31.3%) ‘다소 좋아졌다’(54.2%) 등 긍정적인 평가가 85.5%에 달했다.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답변은 14.5%에 불과했고 ‘나빠졌다’는 답변은 한 건도 없었다.
가장 몰라보게 달라진 부분은 외국기업에 대한 인식. 복수 응답에서 외국기업인 65.4%가 외국기업을 대하는 정부나 국민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답했다.
하지만 외국기업이라는 이유로 차별 대우를 경험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72.3%가 ‘조금 또는 많이 있다’고 답해 여전히 외국기업에 대한 배려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기업 및 회계 투명성(38.5%), 인프라(33.8%), 외환 거래(32.4%) 등도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이후 많이 개선된 분야로 평가됐다.
향후 추가 투자 전망도 비교적 밝은 것으로 조사됐다. 응답자의 27.2%가 추가 투자를 하겠다고 응답했고, 39.5%는 추가 투자를 적극 고려중이라고 답했다. 특히 이들 중 향후 2년 이내에 추가 투자를 하겠다는 답변이 66.1%에 달했다.
▼여전히 높은 부패지수
반면 11개 응답 항목 중 ‘부패(腐敗)’가 개선됐다는 응답은 5.9%에 불과해 여전히 한국 내에서 뇌물 관행 등이 횡행한다고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 한국에서 기업 활동을 하면서 뇌물이나 대가 등을 요구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절반에 가까운 46.9%가 ‘그렇다’고 응답했고, 20.3%는 ‘여러 차례 있다’고 답했다.
뇌물이나 리베이트, 급행료 등을 요구받은 곳으로는 거래업체가 64.9%로 가장 많았고, 지방자치단체(37.8%) 민간단체 및 협회(35.1%) 정부기관(29.7%) 세관(27.0%) 언론매체(24.3%) 등도 적지않게 꼽혔다.
한국에서 기업활동을 하는데 어려움이 되는 요소를 복수로 꼽으라는 질문에서도 ‘부정ㆍ부패’가 31.7%의 응답률로 4번째로 많이 지적됐다.
▼높은 세율, 불합리한 노사관계
한국 내 기업활동의 가장 큰 어려움은 조세(48.8%)와 노사관계(45.1%). 조세 관련 현안 중 한국의 투자 매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는 법인세(66.7%)와 소득세(66.7%)가 지적됐고, 접대비 공제 한도가 너무 적다는 불만도 37.3%에 달했다.
노동 관련 현안 중에서는 노조(59.0%)와 정리해고의 어려움(50.0%)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각종 행정규제(40.2%)나 부패(31.7%), 언어 장벽(30.5%) 등 또한 국내에서의 기업활동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지적됐다. 하지만 남북관계는 한국 내 투자에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는다(57.3%)고 생각했다.
규제기관과의 마찰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세무당국과 마찰을 빚은 적이 있다는 응답이 무려 86.3%에 달했고 관세 당국(64.3%), 출입국 관청(58.8%), 일반 행정기관(58.8%), 노동 관청(51.3%), 금감위ㆍ금감원(45.0), 경제단체 및 협회(45.0%) 등과도 기업활동을 하면서 적잖게 부딪힌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에서 생활하면서 느끼는 불편으로는 언어 장벽(66.7%)을 압도적으로 많이 꼽았고, 오염(48.1%), 각종 표지판(37.0%), 불친절(30.9%) 등이 뒤를 이었다. 교육(25.9%)이나 주거환경(25.9%), 출입국 절차(21.0%), TV 등 방송 환경(14.8%) 등도 불편 요인으로 지적됐다.
▼동북아 허브 불가능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동북아 허브 실현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렸다. 응답자 42.7%가 긍정적인 답변을, 32.9%가 부정적인 답변을 했고 확실치 않다는 답변도 24.4%에 달했다.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섣불리 단언하기는 이르다는 평가다.
이들은 동북아 허브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가장 먼저 언어(61.0%)를 꼽았다. 네덜란드나 싱가포르, 홍콩 등 허브 역할을 하는 어느 나라도 영어로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않은 곳은 없다.
다음은 조세(51.2%). 높은 법인세나 소득세를 기업활동의 장애요인으로 지적했듯 적극적인 투자를 위해서는 ‘낮은 세금’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물류(22.0%)나 경제특구(20.7%) 등 하드웨어적 측면이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인천공항에 대해서는 95.1%가 ‘허브 공항’으로서 나름대로 자격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응답자들이 꼽은 한국 시장의 가장 큰 강점은 내수시장(66.3%). 풍부하고 숙련된 노동력(55.4%), 통신 환경(53.0%) 등도 장점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지리적 위치(37.3%)가 매력적이라고 평가한 사람은 예상보다 많지 않았다.
■ 亞 5개도시 투자환경 조사
국내에서 활동하는 외국기업인에게 비친 ‘코리아 허브’의 실상은 아직까지 초라하기 그지 없다. 잠재력만 있을 뿐 아직까지 경쟁국과 비교해 우월한 부분은 거의 없다는 것이 이들의 냉철한 평가다.
서울, 홍콩, 싱가포르, 상하이(上海), 도쿄(東京) 등 5개 도시에 대해 9개 항목의 투자 환경을 비교ㆍ조사한 결과 아시아 허브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싱가포르가 거의 전 항목에서 1위를 차지했다. 반면 서울은 3개 항목에서 최하위를 기록하는 등 5개 도시 가운데 투자 환경이 가장 열악한 것으로 평가됐다.
조사는 응답자들이 9개 항목에 대해 도시별로 각각 5점(매우 좋다), 4점(좋다), 3점(보통), 2점(나쁘다), 1점(매우 나쁘다)의 점수를 매겨 이를 평균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싱가포르는 예상 대로 인력공급 항목을 제외하고는 모두 평균 4점을 넘어섰다. 인력공급은 3.79점에 그쳤지만 5개 도시 중에서는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고, 1위를 차지하지 못한 분야는 쇼핑환경과 물류환경 2개 항목 뿐이었다.
홍콩 역시 쇼핑환경, 물류환경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대부분 항목에서 골고루 높은 평점을 받았다. 언어환경(4.17점), 자본접근성(4.00점), 노사관계(3.73점), 교육환경(3.69점), 투자인센티브(3.65점), 주거환경(3.30점) 등은 모두 싱가포르에 이어 2위 자리를 지켰다.
반면 서울은 교육환경(2.66점), 노사관계(2.29점), 물류환경(2.78점) 등 3개 항목에서 5개 도시 중 최하위 점수를 받았으며 언어환경(2.30점)이나 자본접근성(2.76점) 등도 간신히 최하위를 면하는데 그쳤다. 그나마 인력공급(3.50점)과 쇼핑환경(3.07점), 주거환경(3.02점)이 평균(3점) 점수를 간신히 넘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향후 동북아 허브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여야 할 상하이와 비교했을 때도 전망은 그다지 밝지않다. 상하이는 투자인센티브 면에서 3.42점으로 서울(2.90점)을 크게 앞선 것은 물론 홍콩(3.65점)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됐고, 노사관계(3.18점) 역시 서울(2.29점)과 큰 차이를 보였다.
서울이 상하이를 앞선 분야는 쇼핑환경과 자본접근성 2개 항목 뿐이었으며 인력공급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삼성경제연구소 오승구(吳承九) 연구위원은 “투자 환경 등 모든 면에서 경쟁 도시인 상하이에 뒤쳐져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지속가능한 성장 등 아젠다 마련, 고급 인력 양상, 영어 문제의 실질적 해소 등 장기적이고 복합적인 국가 전략이 마련돼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이영태기자/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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