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6월23일 중국 광저우시(廣州市) 사지(沙基)에서 유럽 군대가 중국인 시위대에게 발포해 50여명이 죽고 170여명이 다치는 참극이 빚어졌다.이 사지 사건은 중국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을 불러일으키며 이듬해 10월까지 여진을 이어갔다.
6ㆍ23사건이라고도 부르는 사지 사건은 그보다 한 달 전 상하이(上海)에서 일어난 5ㆍ30사건의 한 지류였다.
5ㆍ30사건이란 불평등 조약의 비호 아래 중국 노동자들을 착취하던 제국주의 국가 출신 경영자들에게 노동자ㆍ학생들이 파업과 시위로 맞서다 열강의 무력 개입으로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사건 다음날인 5월31일, 상하이 노동자 20여만 명은 상하이 총공회(總工會)를 조직하고 6월1일부터 총파업에 들어갔다.
학생들과 상인들도 동맹휴학과 폐점파업으로 호응해, 6월7일에는 운동의 지휘부로 공상학연합회(工商學聯合會)가 결성됐다.
자본가들의 모국인 영국ㆍ일본ㆍ미국ㆍ이탈리아 등은 군대를 파견해서 이 운동을 억누르는 한편 중국인 중소 자본가들을 민중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갖가지 공작을 시도했다.
상하이 총파업은 8월 말에 끝났지만, 6월23일 사지에서 영국ㆍ프랑스ㆍ포르투갈군에 의해 대규모 살상이 일어나면서 광저우와 홍콩에서는 투쟁이 다시 점화돼 1년 반 동안 이어졌다.
중국 민중의 반제국주의 운동을 지지하던 광둥(廣東)의 국민당 정부는 홍콩을 봉쇄함으로써 이 투쟁에 호응했다.
광저우는 광둥성의 성도(省都)이자 화난(華南)지방 최대의 무역도시다.
이 도시에는 1917년 이래 쑨원(孫文)을 대원수로 한 세 차례의 군정부(軍政府)가 수립돼 1925년 중화민국 국민정부로 개조된 바 있고, 1927년에는 중국 공산당 지도 아래 광둥 코뮌(중국명으로는 廣州公社)이라는 인민정권이 수립되기도 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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