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 100일 동안'/존 에반젤리스트 월시 지음ㆍ이종인 옮김세상의 신비로운 일 중 하나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사건일 것이다.
영국의 낭만주의 천재 시인 존 키츠(1975~1821)도 그러했다. 그가 스물 세 살에 만난 패니 브론은 별로 예쁘지도 않았고 문학적인 감수성도 없었다.
발랄하긴 했지만 진지한 대화를 싫어하고 경박한 농담만 늘어놓는 여자였다. 이 ‘피곤한 여자’는 그러나 영문학사의 눈부신 명시의 모티프가 되었다.
평소 “예술가가 가치 있는 대작을 써내려면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키츠는 무정하고 허영심 많은 한 여성을 만난 뒤 ‘불가피한 자연 현상의 희생자’가 돼버렸다.
‘죽기 전 100일 동안’은 전기 작가 존 에반젤리스트 월시가 2000년에 쓴 키츠 평전이다.
제목과는 달리 키츠 생애의 마지막 3년을 다룬다. 폐결핵을 앓다가 스물 다섯 살에 죽기 전 3년은 키츠의 위대한 시 대부분이 쓰여진 시기이기도 했다. 키츠에게 문학적 영감을 부여한 것은 물론 사랑이었다.
키츠는 다른 남자와 시시덕거리는 패니 때문에 지옥 같은 고통에 시달렸으며, 다시는 패니와 만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수없이 반복했다. 그리고 시를 썼다.
키츠의 3대 애송시로 꼽히는 ‘나이팅게일에게’의 한 부분.
‘어둠 속에서 나는 듣노라, 그리고 아주 여러 번/ 나는 포근한 죽음과 절반쯤 사랑에 빠졌노라./ 아름다운 가락으로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노라./ 나의 이 고요한 숨결을 공기 중에 흩뿌려 달라고.’
물론 패니도 볼품 없이 키 작은(키츠의 키는 157㎝였다), 허약한 남자를 사랑했다.
키츠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두 사람은 약혼했으며, 키츠가 죽은 뒤에도 패니는 그의 연애 편지를 고스란히 간직했다.
저자는 이 편지를 자료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편지를 간직한 시인의 옛 연인의 삶을 좇았다.
키츠가 숨진 뒤 그와의 열애를 비밀에 부친 채 열두 살 어린 남자와 감행한 결혼, 죽음이 가까웠음을 깨닫고 자식들 앞에서 고백하는 순간 등 패니의 여생이 한 장(章)을 차지한다.
의도적이던 아니던 패니는 키츠에게 중요한 것을 주었다. 키츠가 그토록 갈망했지만 결국 얻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 ‘문학적 영원 불멸’이었다.
평전이 각별한 무게를 두고 다루는 한 부분은 키츠가 ‘죽기 전 100일 동안’이다. 키츠는 각혈을 시작했고 폐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1820년 11월 이탈리아 로마로 떠났다.
로마에서의 100일을 함께 한 사람은 패니가 아니라 친구인 화가 조지프 세번이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대문호가 되지 못하리라는 절망, 사랑하는 사람과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키츠를 세번은 감싸안았다.
키츠는 친구의 희생이 기독교 신앙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았다. 시인의 마지막 말은 “하느님, 감사합니다”였다. 세번의 헌신은 키츠 사후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는 것으로 보답받았다.
죽음을 예감한 키츠는 세번에게 부탁했다. 묘비명에 이름도 넣지 말고 그저 자신이 원하는 한 줄만 적어달라는 것이었다.
로마 북부의 개신교 묘지에 자리잡은 그의 무덤 비석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여기 물 위에 이름을 새긴 사람이 누워 있노라.”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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