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문화의 몰락'/모리스 버만 지음ㆍ심현식 옮김“대중들이 지엽적인 문제에 온통 정신이 팔리거나 문화적인 삶이 끊임없는 오락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된다면, 그 국가는 분명히 문화적인 죽음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문화역사학자 모리스 버만이 쓴 ‘미국 문화의 몰락’의 서문 첫 문장이다. 그는 미국 문화는 엉망진창이고 죽어간다는 진단으로 시작한다.
겉보기에는 활력이 넘치고 경제도 호황을 누린다지만, 알맹이 없는 쭉정이요 실체 없는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기업이 지배하는 상업주의 문화에 모든 상상력을 양도한 채 목적의식도 창조력도 잃어버린 지 오래라고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미국 사회의 활력은 상업주의 문화의 광란일 뿐이다. 이 책의 부제 ‘기업의 문화 지배와 교양 문화의 종말’이 그의 시각을 집약하고 있다.
그는 미국 문화의 몰락을 가리키는 징후 네 가지를 짚는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가속화, 흔들리는 사회보장제도, 지적 수준의 하락, 소비주의 문화와 정신적 죽음이 그것이다. 고대 로마 제국 말기에 나타난 현상과 비슷하다.
그의 눈은 날카롭고 어조는 신랄하다. 지성의 보루여야 할 대학조차 천국(고수익 직장)에 갈 수 있는 면죄부(학위)를 파는 곳으로 변했다고 규탄한다.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빌 게이츠의 연간 소득은 미국 내 하위 40%의 소득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고, 상위 20%가 미국 전체 소득의 93%를 차지하는 등 미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고소득층으로의 소득 재분배’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꼬집는다.
문맹률은 급격히 상승하고, 성인의 15%가 세계지도에서 자기 나라를 찾지 못할 정도로 미국은 ‘둔재 생산국’이 되어버렸고 한탄한다.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상업주의는 미국 문화를 속물성,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저급함이 뒤범벅된 쓰레기 더미로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이처럼 격렬한 성토는 지은이의 애국적인 열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모든 문화는 생성, 발전, 소멸의 단계를 겪을 수 밖에 없으며, 미국 문화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하면서도 미래의 희망을 구하고 있다.
그는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 불빛을 본다. 고대 로마의 붕괴 이후 중세의 암흑기 동안 수도원은 문화의 저장고였다.
수도사들은 4세기 경부터 그리스 로마 문명의 가치있는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 앞장섰다. 그들이 수행 삼아 열심히 모으고 베꼈던 고전과 필사본들은 12세기 유럽 문예부흥의 토대가 됐다.
그는 그러한 수도사적 실천만이 미국 문화 회생의 길이라고 제안한다.
몰락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참된 가치를 지닌 문화를 골라 보존한다면 언젠가 르네상스를 맞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수도사적 해법은 어떤 조직적 운동이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종의 생활방식을 뜻한다.
지은이는 환경운동이나 페미니즘 등이 조직적 운동으로 발전하면서 상업적인 변질을 겪었음을 지적하면서, 조직이 아닌 개개인의 수도사적 실천을 강조한다.
기업이 지배하는 소비주의 문화의 광풍에 휩쓸리지 않고 비판적 사고를 지키면서, ‘은밀하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지적 영역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21세기 수도사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로마 제국 말기 유럽 대륙의 사회적 혼란을 피해 보존해야 할 문화 유산을 챙겨 아일랜드의 외딴 섬 수도원에 은둔한 수도사들처럼, 오늘의 수도사들은 드러내지 않고 각자 소임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요구는 거창하거나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다. 디즈니 만화영화 대신 미술관을 찾고 베스트셀러 대신 고전을 읽는 식의, 작지만 줏대있는 실천이다.
이 책의 원제는 ‘미국 문화의 여명’(The Twilight of American Culture)이다. 짙은 어둠 속에서 새벽을 준비하려는 마음가짐의 표현처럼 느껴진다.
과연 새벽이 올까. 지은이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르네상스의 가능성은 영영 사라진다고 경고한다.
미국 문화의 몰락을 바라보는 그의 위기감은 절박하다. 미국 문화 따라가기에 바쁜 우리나라 상황을 떠올릴 때 그런 걱정은 남의 일 같지 않다.
오미환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