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한복판에 ‘윌러드’(Willard)라는, 유서깊은 호텔이 있다.1816년 세워진 이 호텔은 백악관과 가까이 있는 탓인지 미국 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많다. 암살위협에 시달린 링컨 대통령당선자는 이 호텔에 몰래 숨어 들어와 정권인수 작업을 했다.
1860년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처음 미국 땅을 밟은 일본 정부대표단도 이 호텔에 묵었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윌슨 대통령의 주창에 의해 있은 국제연맹 창설 회의도 이 호텔에서 열렸다.
이 호텔에 얽힌 많은 일화 가운데 단연 압권은 ‘로비’(lobby)에 얽힌 것이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 총사령관으로서 승리의 주역이 된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은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한 뒤인 1868년 18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말을 타고 전장터를 누볐던 그로서는 백악관 생활이 답답하기만 해 일과가 끝나면 윌러드 호텔의 로비에서 브랜디 한잔에 시가를 즐기는 게 낙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잠시 쉴 틈을 안주고 접근해오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이 났고 급기야 그는 그들을 경멸조로 ‘로비스트’(lobbyist)라 불렀다.
영국 하원의 복도를 ‘로비’라고 한데서 그 말이 생겨났다는 얘기도 있으나 미국 쪽에서는 윌러드 호텔의 얘기가 정설로 돼있다.
남북전쟁 이후 수많은 법안, 정치현안, 이권 등이 생겨났고 백악관에서 의회쪽으로 난 펜실바이나가(街)에 있는 이 호텔은 브로커들로 넘쳐났다.
그로부터 발달한 미국의 로비산업은 다른 어떤 부문에 뒤지지 않고 빠르게 성장해왔다.
여전히 긍정론과 부정론이 엇갈리지만 입법 행정 사법의 3권(權)과 4권이라는 언론에 이어 ‘제5권’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에서 로비는 거의 모두 불법행위다. 돈을 받고 로비를 했다면 누구든지(변호사는 빼고)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검찰ㆍ경찰의 수사나 법원의 재판에 관한 로비에 얽혔다면 변호사법 위반으로, 그 밖의 이권에 개입했다면 알선수재 혐의로 걸려든다.
김대중 대통령의 3남 홍걸씨가 구속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고 차남 홍업씨가 사법처리의 목전에 선 것도 같은 사유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예외없이 터져나오는 권력형 비리가 모두 로비와 관련된 것들이다. 정치권에서는 앵무새처럼 ‘재발방지’의 약속을 되뇌어왔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로비를 마냥 ‘더러운 것’으로 취급해 암시장에 묶어두고 있는 탓이 아닐까.
오랜 독재권력의 경험을 갖고 있는 한국에서 로비는 항상 한 방향으로, 그리고 불투명한 방식으로 움직였다. 이권은 모두 정치권력이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권력자에게 막대한 돈을 주고 이권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거꾸로 권력은 그 돈을 정권유지의 비용으로 사용했던 게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가 보았던 일이다. 새로운 사업, 공사입찰, 세금문제 등을 막론하고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기업의 관행이었다.
독재권력이 사라진 지금까지도 그 관행은 ‘무서운 관성(慣性)’으로 남아있다. 이권의 수요자나 공급자나 아직 과거의 의식으로부터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면 여전히 새로운 권력자의 주변에 ‘파리떼’가 들끓고 그 중에서도 대통령의 아들을 비롯한 친인척은 좋은 표적이 되고 있다.
이제는 로비를 합법화할 때가 됐다. 변호사나 세무사, 변리사, 공인중개사 등의 경우처럼 합법과 불법의 기준을 마련함으로써 로비를 암시장에서 끌어내야 한다.
시장경제의 필수요건인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도 공개적이고 투명한 로비활동이 필요하다.
‘다람쥐 쳇바퀴 돌기’식의 권력형 비리를 어느 정도나마 없애기 위한 사회적 필요악일 수 있다. 정치권이 권력형 비리를 놓고 말싸움만 할 게 아니라 한번쯤 이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해보기를 권한다.
신재민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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