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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젊음의 빈 잔을 채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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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젊음의 빈 잔을 채우자

입력
2002.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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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축구 때문에 열광하는 것을 보니 70년대 초의 축구 열기가 생각난다.그 때는 메르데카배니 킹스컵이니 하는 아시아권의 축구대회가 젊은이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다방마다 흑백 TV를 향해 빼곡히 앉아 일제히 환성을 지르던 그 열기는 결코 지금에 못지 않았다. 그 무렵 무슨 중요한 대회를 앞둔 날이었다.

나의 친구 하나가 자기 친구의 이야기라며 “일주일 후에 있을 경기가 끝나면 그 다음에는 무슨 재미로 살 지가 걱정”이라고 긴 한숨을 내쉬더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웃었지만 아무 것도 아닌 그 말을 지금껏 기억하는 데에는 그 말에 젊음 특유의 신산함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제 월드컵 축구대회도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다. 7월이 오면 텅 빈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잔디밭에는 종일 구름 그림자만 오락가락하는 적막이 깃들 것이다.

5개 대륙의 거친 사나이들이 내뱉던 고함과 분주한 발걸음, 그리고 무수한 환호와 탄식, 서울·부산·대구·인천의 저 물밀어 가던 붉은 인파도 다만 우리의 기억 속에 꿈결처럼 남을 날이 오는 것이다.

나는 그 7월에 Be the Reds!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목이 쉬도록 외치던 우리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 지가 자못 궁금하다.

삼십 년 전 내 친구의 친구도 역시 그 경기가 끝난 이후의 나날들을 무언가 허전한 생각들로 메워 갔을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월의 근본 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수출 주력상품이 합판에서 자동차로 바뀌었지만 경제성장률에 전전긍긍하는 집단적 삶의 행태는 별 변함이 없다.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틀은 우리의 생명력이 순조롭게 생육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어떤 질서에 기탁해야 할 지 몰라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기성세대와 달리 삭막한 현실과 쉽게 타협할 수 없는 젊음은 그래서 늘 불안정하다.

젊음은 신성하고 고귀한 무엇, 그들이 뜨겁게 헌신할 무엇을 여전히 갈망하고 있다. 그 갈망은 젊음의 내부에 커다란 공허를 빚고 그 공허는 젊음을 더욱 불안정하게 풀무질한다.

그것은 사회학적 상상력에 의해 그 갈망을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었던 80년대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오늘의 젊은이들은 그 공허에 훨씬 정면으로 마주서 있는 것이다.

지하철 구내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다 보면 누가 보든 말든 서로 껴안고 있는 젊은이들을 볼 때가 많다. 그 때마다 나는 묘한 애처로움을 느낀다.

그들의 눈에 사랑은 이제 그들이 믿고 헌신할 수 있는 유일한 순수의 땅이고 이 광막한 삶 속에서 고귀함과 ‘인간’이 남아 있는 마지막 오아시스처럼 보일 것이다.

이어폰으로 모든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고 듣는 그들의 음악은 온통 폐쇄적인 사랑의 암호들로 가득하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젊음이라는 마지막 생명력을 서로 탐닉하며 소진시키고 있는 듯한 형국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이번 6월은 젊음의 내적 생명력 속으로 무작정 탐닉해 들어가던 이들의 열정과 사랑을 미증유의 스포츠 제전에 담아 분출해 보는 특별한 한 달이 아닌가 한다.

비록 그것이 삶의 진정한 현장은 아니지만 이 거대한 생명의 미메시스를 통과한 후 맞는 7월은 무언가 조금은 달라진 시간이 될 것이다.

텅 빈 경기장에, 또 훨씬 깊고 조용해진 7월에 내려와 담길 그 무엇을 나는 많은 젊은이들이 간취(看取)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젊음은 공허를 안고 있기 때문에 기성의 가치와 인습을 되돌아볼 소중한 기회도 갖는다. 저 물밀어 가는 붉은 인파 가운데에도 그 기회를 예민하게 잡아 자기 성숙의 계기로 삼을 줄 아는 슬기로운 젊은이들이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이수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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