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내가 꿈꾸었던 장래희망은 오직 소설가 뿐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을 때부터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무렵 지금도 아주 선명하게 기억되는 장면이 있다.어렸을 때 나는 누구에게 야단을 맞거나 엄마에게 혼나면 엉엉 우는 버릇이 있었다. 한참을 울다 보면 갑자기 이대로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곤 했었다.
주로 물에 빠져죽는 장면을 떠올리곤 했는데, 그럴 때면 문득 내 죽은 모습을 보고 자신의 가슴을 치고 슬피 우는 엄마의 모습이 자연 연상되어 떠오르고, 그러면 내 슬픔에 엄마의 슬픔까지 더해지고, 내 눈물에 상상의 눈물이 더해져서 제 슬픔에 겨워 한참을 흐느껴 울다가 지쳐 잠이 들곤 했었던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어린 나이에도 이것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독창적인 방법이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이란 소설을 읽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주인공 톰이 허크와 해적 놀이를 하고 하도 속을 썩이니까 어느날 폴리 아줌마가 미시시피 강에 나가서 죽어버리라고 말을 한다.
마침내 집을 나온 톰은 실제로 강물에 빠져죽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순간 자기를 미워하던 폴리 아줌마가 죽은 자신의 시체 앞에서 “아이고 우리 톰은 참 착한 아이였지요” 하고 말하며 우는 모습을 상상하여 떠올린 후 실제로 제 슬픔에 겨워서 톰은 엉엉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 장면을 읽은 순간 나는 소름이 끼쳤었다.
어떻게 나 혼자만의 독창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소설 속의 주인공 톰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똑같이 따라 하고 있단 말인가. 그보다도 톰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을 만들어낸 마크 트웨인이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가 톰이란 소설 주인공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에 이 놀라운 슬픔의 방법은 실은 마크 트웨인이라는 소설가가 발명해낸 것이 아닌가.
어린 내 가슴 속에 들어 있는 독창적인 비밀을 날카롭게 소설 속에 묘사해 놓은 작가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어린 시절 학교에서 곤충 채집을 해오라고 방학 숙제를 내준 적이 있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채집망을 들고 산으로 들로 나아가 나비도 잡고, 잠자리도 잡았었다. 잡은 나비를 날카로운 침으로 찔러 표본을 만들면 날아다니던 나비는 나비 모습 그대로 한 순간에 정지된다.
마찬가지로 작가는 도대체 누구인가. 함부로 내 마음 속에 날아다니는 감각의 나비를 채집하는 작가는 도대체 누구인가.
작가들은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의 부호로 날아다니는 생각의 곤충들을 채집하여 책 속에 꽂아놓는 마법사가 아닐 것인가.
작가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어린 소년의 빗장을 열고 그 가슴 속에 들어 있는 전생으로부터 가져온 비밀과 어둠, 운명으로부터 빌려온 성욕과 은밀한 쾌락 같은 것을 단숨에 엿보고 그것을 또한 문장으로 생생하게 묘사해낼 수 있는 것인가.
정확히 그 이후부터라고는 꼬집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무렵 이후부터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으며, 책을 읽을 때는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을 따라가지 않고 그것을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 소설을 읽는 습관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가령 예를 들어 ‘피노키오의 모험’을 읽을 때면 피노키오의 파란만장한 모험보다는 피노키오라는 주인공을 작가 콜로디는 왜 만들었을까, 콜로디는 왜 주인공을 목각인형으로 만들었을까, 그리고 거짓말을 할 때마다 소설가는 왜 피노키오의 코가 자라나게 하였을까 하는 독서 습관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비단 소설 뿐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 한참 유행하던 ‘밀림의 왕자’와 같은 만화를 볼 때에도, 학생 잡지에 유행하던 ‘검은 별’이라든지 ‘얄개전’을 볼 때도, 심지어 영화를 볼 때에도 나는 영화의 주인공보다는 그것을 만든 감독에 대해서, 만화의 내용보다는 그러한 캐릭터를 만들어낸 만화가에 대해서 더 많은 흥미를 느끼곤 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곤 했었다.
내가 만일 이 만화를 그린 만화가라면 이렇게 유치하게 그리지는 않겠다. 내가 만일 이 작품을 쓴 작가라면 이 소설을 이렇게 따분하게 쓰지는 않겠다. 내가 만약 피노키오를 쓴다면 치사하게 피노키오와 제페트를 고래에게 먹혀서 고래의 뱃속으로까지 모험을 떠나게는 하지 않겠다. 고래의 뱃속으로까지 들어간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닌가.
작가는 이 부분에서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다. 목각인형 피노키오가 결국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내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 보다 실현 가능한 모험 속에서 사랑을 통해 피노키오가 착한 사람이 되는 과정이 중요하지, 고래의 뱃속에까지 들어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 이후부터 나는 독자라기보다는 작가의 입장에서, 관객이라기보다는 감독의 입장에서, 시청자라기보다는 제작자의 입장에서 모든 예술 작품을 읽고 보는 시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내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어린 시절 꿈꾸었던 작가의 꿈이 한 번도 바뀌지 아니하고 그대로 이루어진 사실은 인생의 큰 축복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특히 내 중ㆍ고등학교 시절은 작가가 되기 위한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실험 기간이었다.
스피노자가 말했던가. “지금 이 순간의 현실에 머물러 있지 말고 먼 영혼에서 현재를 보라.”
스피노자의 말처럼 나는 먼 훗날 작가가 된 입장에서 현재의 나를 회상하듯 그렇게 중ㆍ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마치 내 하루하루를 수십 년 후에 들춰본 일기장의 내용 그대로 재연하듯 그렇게 살았던 것이다.
그랬으므로 현재의 하루 하루는 작가인 내게 있어 어른과 아이가, 현재와 추억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또한 과거와 미래가 함께 어우러져 있어 현재도 아니고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제3의 공간 속에서 외계인처럼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하루에 단편 하나씩을 쓰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공부는 뒷전이었고, 책가방 속에는 소설을 쓰기 위한 노트와 펜 하나 뿐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도벽이 심한 한 소년의 비행을 그린 ‘벽구멍으로’란 소설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이 되었을 때 장안에 큰 화제가 되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먼 미래의 눈에서 현재를 회상하고 있었으므로 너무나 당연하게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꿈에 그리던 작가가 된 것이었다.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글을 쓰면서도 결국 문학이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느꼈던 생생한 경이감의 확대에 불과한 사실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곤 한다.
어린 시절 나는 엄마에게 꾸중을 들으면 엉엉 우는 버릇이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요즘도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고통에 신음하고 통곡한다.
인간은 존재하는 것 자체로 상처 입고 슬퍼하는데, 작가인 내게 있어 문학은 그 고통에 감응하는 눈물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쓰는 문학은 어린 날 내가 울던 하소연의 눈물과 같은 것이다.
또한 내가 가진 상상력을 보태어 나를 상상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내가 상상하는 가공의 세계 속으로 떠나가 버림으로써 내 슬픔의 강도를 올려 스스로 더욱 슬퍼하듯, 내가 쓰는 문학은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보았을 때 그 우는 모습이 불쌍해서 더욱 슬피 우는’ 일종의 자위 행위이며 근친상간의 자독(自瀆)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극도의 이기주의자이며, 그 시대의 저잣거리를 동냥하여 한끼의 저녁 식탁을 차리는 거렁뱅이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기록자인가, 창조자인가.
2,000년 전 예수라는 목수를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복음(福音)을 기록하였다. 이것이 신약성서가 되었다.
또한 2,500년 전 석가모니를 따라다니던 제자 아난타(阿難陀)는 자신이 보고 들었던 부처의 말을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는 말로 시작되는 경문을 기록하였다. 그것이 불경이 되었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있어 문학은 무엇인가. 작가는 태어난 순간 그가 보고 듣는 모든 인생의 비의(秘意)를 예수의 제자처럼 기록하는 언어의 사도(使徒)들인가.
또한 작가는 자기가 보고 들었던 모든 존재의 현상들을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고 외워 주술했던 아난타처럼 전해주는 전달자인가. 아니면 작가는 영매(靈媒)인가. 신이나 망령에 접신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전언하는 무당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가에게 있어 문학의 원형은 창세기와 맞닿아 있다.
‘빛이 있어라’ 하자 빛이 생겨나듯 모든 작가의 붓 끝에서 하늘과 땅이 창조된다.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그 사람의 코에 입김을 불어넣어 사람을 만든 신의 창조처럼 모든 예술의 원형은 신의 창조 행위를 모방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문학은 신의 창작 행위를 모방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예술가에 있어 모든 미술과 음악, 춤 그리고 문학은 신의 창조 행위를 모방하는 아류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문학이란 행위를 통해 진흙 덩어리의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려는 인간의 머리와 짐승의 동체를 지닌 괴물, 즉 반인반수의 스핑크스인 것이다.
작가로서 나의 마지막 소망은 내가 불어넣는 입김에 영성(靈性)이 깃들기를 바랄 뿐이다. 마치 목각인형 피노키오가 마침내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 되었듯이.
● 연보
▲1945년 서울 출생
▲1963년 서울고 재학중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벽구멍으로’ 입선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견습환자’ 당선,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단편 ‘2와 1/2’ 당선
▲1972년 연세대 영문과 졸업
▲단편집 ‘타인의 방’ ‘위대한 유산’ ‘달콤한 인생’ 등 장편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도시의 사냥꾼’ ‘지구인’ ‘불새’ ‘적도의 꽃’ ‘잃어버린 왕국’ ‘길 없는 길’ ‘사랑의 기쁨’ ‘상도’ 등 연작소설 ‘가족’ 산문집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어머니가 가르쳐준 노래’ 등
▲현대문학상(1972) 이상문학상(1982) 가톨릭문학상(1998)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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