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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워치] 영광과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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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워치] 영광과 좌절

입력
2002.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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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월드컵 8강 기적에 온통 들뜬 18일 밤, 멀리 북해의 작은 섬나라 아일랜드도 잔치 분위기였다고 한다.아일랜드는 16일 수원에서 스페인과 치른 16강 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3대2로 패했다. 그런데도 귀국한 대표팀은 국민적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더블린 공항에 도착한 대표팀은 헬리콥터로 환영 행사장인 피닉스 공원으로 가서 메리 멕커리스 대통령을 비롯한 10만 환영 인파에 파묻혔고, 선수와 시민들은 록 밴드와 함께 밤새 어울렸다.

인구 380만 명에 불과한 아일랜드는 국제적 스타 플레이어 하나 없는 팀으로 유럽 예선에서 네델란드를 격파하는 등 돌풍을 일으켰다.

본선에서도 사우디를 제치고 독일 카메룬과 비겨 처음으로 16강에 올랐다. 이에 따라 신화 창조가 기대됐으나 스페인의 벽에 막혔다.

스페인전 패배 뒤 울먹이는 선수를 감싸안은 맥카시 감독이 선수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아일랜드축구협회 홈페이지는 ‘영광의 항해가 끝났다’고 썼다.

이런 에피소드가 남다른 느낌을 주는 것은 축구 약소국이 험난한 16강 고지에 오른 때문이 아니다.

월드컵에 거는 기대와 열망이 누구보다 강렬하고 진지했으면서도, 절제와 안분(安分)을 지키는 모습이 무엇보다 인상 깊다.

아일랜드는 참가국 가운데 가장 많은 1만5,000여 응원단이 조별 리그를 치른 일본과 수원까지 몰려와 녹색 응원을 펼쳤다.

그 배경은 다른 유럽국가의 월드컵 열기와는 다르다. 축구는 국기(國技)가 아니고,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도 아니다.

그런데도 온 국민이 열광한 연유는 오랜 역사적 고난과 빈곤과 멸시를 겪은 약소국 이미지를 월드컵을 통해 떨쳐내려는 염원이었다.

아일랜드는 영국에 인접한 탓에 12세기 이래 오랜 식민 통치를 겪었다. 신교도 영국은 카톨릭인 아일랜드인의 토지를 몰수해 이주 영국인에게 분배했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아일랜드인들은 유명한 ‘아일랜드의 빈곤’에 시달렸다.

2차 대전을 전후한 긴박한 국제 정세를 틈타 1949년 독립을 이뤘으나 1980년대 까지 영국과 유럽에 농축산물을 조달하는 것으로 연명했다.

그 가난 탓에 멸시 받던 아일랜드는 소형 가전제품 하청생산으로 출발, 1990년 대 중반 이후 IT 산업으로 국민평균소득 1만 달러가 넘는 기적을 일궈냈다.

그러나 국민의 자랑인 율리시즈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마저 가난한 조국을 떠난 상처를 안고 있는 아일랜드인들은 경제적 성공을 넘어서는 국민적 자존의 계기를 월드컵 무대에서 얻으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영광과 좌절을 순수한 감동으로 수용하는 모습이 화려한 스타 플레이어, 지나친 애국적 열정, 격렬한 분노 등을 표출하는 여느 국민과 달리 보이는 것이다.

원래 축구 경기에는 전투적 용기와 발레의 아름다움이 함께 있다. 긴장감 넘치는 전투 속에 돌연 찾아오는 우아하면서도 기적 같은 골인 순간은 황홀한 절정감마저 안겨준다.

월드컵이 인류 사상 가장 열정적 잔치 마당이 된 근본도 이렇듯 탁월한 엑스터시 체험이다. 이런 집단 엑스터시 체험이 애국적 열정과 결합하면 국민적 도취가 된다.

단군 이래 가장 거대한 민족 의지의 분출로 평가된 붉은 응원 물결이 바로 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절정과 도취는 언젠가 앤티 크라이막스와 각성의 순간을 맞게 마련이다. 그 순간을 의연하게 맞으려면 미리부터 절제와 분수를 생각해야 한다.

축구 종가(宗家) 영국의 월드컵 열기는 우리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우리의 붉은 응원 물결이 수십만을 헤아릴 때 영국의 길거리 응원인파는 수백만 명으로 집계됐다.

그 곳 언론은 현대의 개인주의 신화를 깨는 이 집단적 열광은 사회통합적 이념과 정신적 지주의 공백을 나타낸다고 진단했다. 열광할 경기가 모두 끝나면, 공허한 사회와 정신은 한층 표류할 것이라는 경고다.

/강병태 편집국 부국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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