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전주에서 벌어진 미국과 멕시코의 16강전. 역사적 숙적 관계인 미국에게 2대 0 완패를 당하면서 북중미 축구 강자의 자존심까지 내줘야 했던 멕시코의 경기에 실망한 사람은 누구보다 비엔테 폭스 멕시코 대통령이었다.그는 현지 시간으로 새벽 1시 30분에 열린 경기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각료들까지 관저로 비상 소집했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의 사적인 통화 폭로와 잦은 외유 등으로 정치적 곤경에 처해 있던 폭스 대통령에게 미국전 승리는 인기를 회복할 수 있는 더없는 기회였다.
뉴욕타임스는 17일 이날 경기는 1847년 미국과의 전쟁으로 영토의 절반을 빼앗긴 이후 멕시코에게 가장 큰 상처를 안겼을지도 모른다면서 폭스 대통령의 인기가 급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정반대로 9월 총선을 앞둔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에게 월드컵은 뜻밖의 정치적 호재가 되고 있다.
유럽의 우경화 바람과 고질적인 실업 문제로 인기가 급락, 대책 마련에 부심하던 슈뢰더 총리는 16강 진출도 불투명했던 독일 대표팀이 우승 후보로까지 거론되자 희색이 만면하다.
슈뢰더 총리는 게임마다 승리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가 하면 당사에서 TV중계를 보면서 환호하는 장면을 적극 홍보하고 있다. 독일 일간지 디벨트는 집권 사민당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에게 월드컵이 판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월드컵은 ‘패트리어트(애국심) 게임’이다. 국가정상들에게 전 국민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는 월드컵만큼 정치적인 홍보 수단은 별로 없다. 국민의 단결력은 물론 유권자의 표를 이끌어 내는 절호의 찬스다. 그래서 월드컵의 승패 여부에 세계 정상들의 희비가 교차하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자국팀 응원은 유별나다. 개막전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은 물론 벨기에와 러시아전에서 직접 메가폰을 들고 응원했다.
일본의 16강 진출이 결정된 14일 튀니지전도 관전하기 위해 “내가 가면 일본팀이 지지 않는다”며 자민당 집행부에 국회 결석을 야당이 이해해주도록 교섭해 달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결국 경기장에 가지는 못했다. ‘주간 포스트’는 “일본팀의 16강 진출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고이즈미 총리의 응원 이미지를 정권 인기 부양에 최대한 이용하려는 총리실의 작전이 세워졌다”고 보도했다.
포르투갈전 승리로 이번 월드컵에 이변을 연출했을 때만 해도 경기 시청은 물론 축전조차 보내지 않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태도는 미국 팀의 8강전 진출로 확연히 바뀌고 있다.
멕시코와의 경기 시작 전 이례적으로 선수단에게 전화를 걸어 축구는 잘 모르지만 응원은 열심히 하겠다는 취지의 격려를 보냈다. 경기를 앞두고는 폭스 멕시코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선전을 다짐했다.
축구 종주국인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에게 월드컵은 축구 이상의 계산이 깔려 있다. 21일 브라질과 벌이는 잉글랜드의 8강전을 보기 위해 유럽연합(EU) 정상회담 일정을 조정하겠다는 블레어 총리는 잉글랜드가 결승에 올라가면 직접 경기를 관전하기 위해 일본행 비행기를 타겠다며 벼르고 있다.
이에 대해 최악의 총리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가 월드컵 열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아프리카 등 약소 국가의 정상들은 월드컵을 국가 홍보와 국민 단결의 호기로 삼고 있다. 압둘라예 와데 세네갈 대통령은 100년 통치를 받았던 프랑스와의 개막전에서 승리하자 이날을 국경일로 선포했다.
그는 대통령 관저 앞에 모인 군중과 어울려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가 하면 가정집으로 찾아가 함께 경기를 시청하는 등 월드컵 대통령으로서의 이미지를 확실히 굳히고 있다.
월드컵 승리를 위해서라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밀란 쿠칸 슬로베니아 대통령은 2일 스페인 경기 도중 자신을 교체시킨 감독과 선수와의 불화를 중재하기 위해 직접 전화를 걸어 “불화를 잊고 승리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또 버티 어헌 아일랜드 총리도 감독과의 불화로 아일랜드의 간판 스타 로이 킨이 팀을 떠났을 때 중재에 나섰지만 허사였다.
김병주기자
bj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