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세계라고 해서 평화롭고 안락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힘을 지닌 강력한 신들은 패권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고 지배적인 신에 대해서는 젊고 패기있는 신들의 도전이 계속되기 마련이었다.제우스가 주신(主神)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부신(父神) 크로노스를 비롯한 여러 신들과 피나는 투쟁을 벌였듯이 중국의 황제(黃帝) 역시 중앙의 신으로 군림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신들과의 전투를 겪어야만 했다.
황제가 점차 세력을 키워가고 있을 무렵 신들의 세계는 이미 황제의 선배격인 염제(炎帝) 신농(神農)이 지배하고 있었다.
신들의 세계에서 신농과 황제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대립적인 권능의 소유자들이었다. 즉 신농은 태양신으로서 불을 통해 능력을 발휘함에 반해 황제는 뇌우(雷雨)의 신으로서 물로 세상을 다스리기 때문이었다.
수화상극(水火相克), 물과 불은 어울릴 수 없다는 말도 있듯이 둘 중의 하나는 물러나야 할 운명에 있었다.
마침내 황제는 군사를 일으켜 신농에게 도전하였고 양군은 지금의 허베이(河北)성에 위치한 판천(阪泉)의 들에서 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황제는 호랑이 표범 곰 등을 길들여서 선봉으로 삼고 독수리 솔개 매 등을 깃발처럼 날려 신농군을 공격하였다.
세 차례의 전투에서 황제군은 모두 승리하였고 신농은 패배하여 남방으로 쫓겨갔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가의(賈誼)의 ‘신서’(新書) 등 한(漢) 나라 때에 지어진 책들은 이 전쟁을 두고 신농이 제후들을 침략하고 도리에 어긋난 일을 많이 했기에 황제가 징벌한 것이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신농의 선신(善神)으로서의 이미지에 부합되지 않는다. 아마 그것은 한 나라 때에 승리자인 황제를 미화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어쨌든 신농은 패배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판천의 전투는 오히려 훨씬 더 큰 전쟁의 서곡에 불과하였으니 그것은 신농의 용맹한 신하 치우(蚩尤)가 등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치우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일대에 거주하던 구려(九黎)라는 신족(神族)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형제가 많아 72명이라고도 하고 81명이라고도 하는데 그들은 모두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를 하고 모래와 돌을 밥으로 먹었다고 한다. 아마 그들의 용감하고 강인한 성품을 표현한 것이리라.
치우의 생김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가 여덟 개의 팔 다리에 둘 이상의 머리를 지녔다는 설도 있고 사람의 몸, 소의 발굽에 네 개의 눈과 여섯 개의 손을 지녔다는 설도 있다.
또 그의 귀밑 털이 칼날과 같고 머리에는 뿔이 돋았다는 설도 있다. 소의 발굽을 했다거나 머리에 뿔이 돋았다는 설은 신농이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이었음을 생각할 때 그가 신농의 혈통임을 암시한다.
치우는 훌륭한 무기제작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일족은 갈로산(葛盧山)과 옹호산(雍狐山) 이라는 곳에서 구리를 캐서 칼과 창 등의 무기를 많이 만들었고 무장한 군사력으로 신농 신족 내에서 가장 유력한 집단이 된다.
학자들은 치우 일족의 이러한 기능에 주목하여 그들이 고대 중국의 변방에 살던 대장장이 집단이고 치우가 우두머리 무당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당시 신농은 이미 은퇴를 했고 그 후손인 유망(楡罔)이라는 신이 신족을 다스리고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치우의 세력이 커져서 유망의 자리를 넘보게 되고 결국 유망이 패하여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치우와 황제간의 전쟁이 벌어졌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역시 황제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치우를 깎아내린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치우의 도전은 자신의 임금이자 어른인 신농의 억울한 패배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복수심에 불탄 치우는 전군을 동원하여 황제의 영역인 탁록으로 진격하였다. 탁록은 지난번 황제와 신농이 싸웠던 판천 근처의 땅이다.
치우의 군대에는 앞서 말한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한 72명 혹은 81명의 용맹한 형제들과 바람의 신 풍백(風伯), 비의 신 우사(雨師) 그리고 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몸을 하고 다리가 넷인 이매 등의 도깨비 무리가 대거 참여하여 사나운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황제 측에서도 대비가 없을 수 없었다.
호랑이 표범 곰 독수리 솔개 매 등의 맹수ㆍ맹금(猛禽) 군단과 충직한 신하인 날개 돋힌 용 응룡(應龍), 황제의 딸이자 가뭄의 여신인 발(魃) 등이 군대를 이루어 치우군에 대항하였다.
전세는 처음부터 황제군에게 불리하였다. 날카로운 무기로 무장한 치우 형제들과 도깨비 군단의 위세에 황제군이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일설에는 황제가 치우와의 처음 아홉 번의 전투에서 모두 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는 마지막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치우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다. 당시의 전투 상황은 어떠했던가.
계속 치우군에게 밀리던 황제는 응룡을 시켜 천상에 엄청난 양의 물을 모아 두었다가 치우군에게 퍼부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을 미리 알아 챈 치우는 풍백과 우사에게 요청하여 그 물을 황제군에게 쏟아 붓도록 하였다.
황제군 위로 갑자기 폭풍우가 불어 닥쳐 병사들이 떠내려가고 우왕좌왕 혼란에 빠지자 황제는 딸인 발을 불러 지상에 내려오게 했다. 가뭄의 신이 나타나자 폭풍우는 곧 개었고 황제군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도깨비 군단이 쳐들어 왔다. 이들은 신음하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내어 황제군을 어지럽게 했다. 황제는 이에 호각을 크게 불어 용의 울음소리를 내게 하였더니 도깨비 군단이 놀라 달아났다.
황제는 호각 외에도 신기한 북을 만들어 자기편의 사기를 돋우고 치우군의 혼을 빼놓았다. 그는 외다리에 천둥소리를 내는 기(夔)라는 괴물을 잡아 그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뇌택(雷澤)이라는 호수 가에 살던 뇌수(雷獸)의 뼈를 뽑아 북채를 만들었다.
그리고 북을 두들겼더니 그 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던지 오백리 밖에서도 들렸다 한다. 여러 번의 전투에서 손실을 본 치우는 이번에는 큰 안개를 일으켜 황제군으로 하여금 갈피를 못잡게 했다. 황제는 이에 신하 풍후(風后)로 하여금 북두칠성을 본따 지남거(指南車)라는 수레를 만들게 하였다.
이 수레는 북두칠성과는 정반대로 항상 남쪽 방향을 가리키게 되어 있었다. 황제군은 지남거에 의지해 방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되어 오히려 치우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그토록 용감했던 치우 형제들도 하나 둘, 전사하고 치우만이 혼자 싸우다가 결국 힘이 딸려 응룡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황제는 치우를 형틀에 채운 뒤 즉각 처형하였다. 이로써 중국 신화에서 보기드문 큰 싸움인 황제-치우 간의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치우는 목이 잘려 몸과 목이 따로 묻혔고 신농과 치우의 신족은 죽거나 변방으로 쫓겨갔다. 그리고 황제는 이제 명실공히 신들의 세계의 주인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황제-치우의 전쟁신화는 한(漢) 나라 때에 이르러 중국민족의 정통성과 권위를 밑받침하는 역사 이야기로 탈바꿈 하였다. 즉 중국민족의 조상인 황제가 야만족인 치우를 물리침으로써 문명의 제국인 중국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신화는 이처럼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죽은 치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신들에게 영원한 죽음이란 없다. 치우는 얼마 안 있어 전쟁의 신으로 부활하였다. 그의 강렬한 투쟁 의욕은 여전히 살아 있어서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숱한 전쟁을 통해 한(漢) 왕조를 건설하였던 고조(高祖) 유방(劉邦) 조차도 치우의 힘을 빌기 위해 제사를 드렸다 한다.
치우는 또한 은(殷) 나라 때에 도철이라는 무서운 괴물의 모습으로 청동기에 새겨져 귀신이나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치우의 이러한 형상과 역할은 신라 시대의 도깨비 모습을 새긴 귀면와(鬼面瓦)에까지 이어진다.
요즘 거리와 경기장을 메운 붉은 악마의 물결과 그들이 휘두르는 깃발에서 도깨비 얼굴을 많이 본다. 붉은 악마 응원단은 이 도깨비가 치우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들은 알까? 그들 자신이 투혼의 상징인 치우가 부활한 몸이기도 함을.
●우리나라와 치우
치우는 동방 지역의 신이었으므로 은이나 고대 한국등 동이계 민족이 숭배하였던 신일 가능성이 크다.치우를 도와 주었던 풍백 우사가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그러한 점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정조때 학자인 홍석모가 정리한 세시풍속집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궁중이나 양반의 집에서 단오날에 부적을 붙이는데 치우의 이름과 형상을 써서 질병을 물리칠 것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글=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그림=서용선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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