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초복도 오기 전에 미리 열을 내뿜는 6월의 태양과 그 더위를 더욱 달구는 월드컵의 열기이다.그늘이 그립다. 고즈넉한 정자나 나무 밑에 앉아 대지의 열기와 가슴 속의 뜨거움을 함께 식히면 좋겠다.
그늘이 드리워진 정원을 찾아간다. 모두 우리 조상의 정신이 배어있는 곳.
특히 얼음처럼 차가운 학문의 기상이 서린 곳이다. 서늘한 그늘에서 그들과 내면의 통화를 하는 것도 가슴을 식힐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산들 바람이라도 불어준다면….
▼소쇄원(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뻣뻣한 대나무도 하늘을 가릴 수 있구나.’ 소쇄원 방문은 굵은 파이프를 촘촘히 박아놓은 듯한, 대숲에 대한 감탄으로 시작된다.
대숲에는 두 개의 길이 나 있다. 사람이 다니는 길과 물이 다니는 길이다. 물소리에 발을 맞춘다. 그리 길지 않은 진입로부터 마음이 가라앉는다.
소쇄원은 조선시대 학자 소쇄 양산보(瀟灑 梁山甫 1503~1557년)가 지은 민간 정원이다.
당시에 이런 정원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하기 힘들지만 이곳은 우리나라 최고의 별서정원(別墅庭園) 또는 원림(園林)으로 꼽힌다.
별서란 선비가 속세를 떠나 은거생활을 하기 위해 마련한 공간으로 살림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지었다. 상주하는 주택이 아니어서 간소하다.
소쇄란 ‘맑고 깨끗하다’는 뜻. 대사헌까지 지낸 양산보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정치의 혼탁함을 뒤로 하고 고향에 내려와 이곳에서 학문에만 정진했다.
당시는 건물이 한 채에 불과했다. 양산보 말년에 두 아들이 일대 최고의 별서정원으로 완성했고 임진왜란에 소실됐던 것을 손자인 천운이 재건했다.
이곳은 그의 성격처럼 맑고 깨끗하고 안락하기까지 하다. 결코 화려하지 않다. 그저 학자의 정원일 뿐이다.
아무 생각 없이 돌아본다면 10분이면 족하다. 그러나 곳곳에서 발길을 잡는다. 적절하게 놓여진 그늘 집(堂), 깊은 계곡을 축소해 옮겨놓은 듯한 앞 뜰의 폭포, 하늘을 향한 대나무숲….
그래서 이곳을 제대로 감상하는 방법은 곳곳에서 ‘머무는 것’이다. 하늘을 가린 대숲에서 발길을 멈추고, 나무 그늘에서 한숨을 돌린다.
지붕이 있는 집이 있다면 마음대로 누워서 땀을 식혀도 좋다.
1만여 평의 규모였지만 지금은 1,350평 정도로 줄어들었고 10여 동의 건물 중 제월당과 광풍각만 남아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정원을 바라보고 있는 제월당은 간결한 우리 건축양식을 축약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아궁이 위로 벽을 시커멓게 그을린 불자취도 정겹다.
건축가 고 김수근씨는 세상을 떠나기 전 열흘간 제월당의 마루에 앉아 생을 정리했다. 일가를 이룬 노 건축가의 영혼은 소쇄원의 정기와 어떤 교감을 했을까.
‘빛과 바람을 맞는 집’ 광풍각 앞에는 작은 폭포가 있다. 사람이 만든 폭포지만 자연의 이치를 거스름 없이 자연스럽다.
물이 시원스럽게 떨어지고 그 물소리에 맞춰 바람이 분다. 더운 수증기를 머금은, 숨막히는 바람이 아니라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맑고 서늘한 바람이다.
소쇄원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아직도 양산보의 후손이 관리하는데 “우리 집을 찾은 손님에게 어떻게 돈을 받느냐?”고 반문한다. 더 시원해진다. 담양군청 문화관광과 (061)380-3223
▼소수서원(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퇴계 이황(1501~1570년)은 회헌 안향(1243~1306)을 이렇게 사모했다. 두 사람은 동방 성리학의 성현으로 불린다.
고려의 회헌은 원나라에서 최초로 주자학을 들여왔고 그 학문은 퇴계에 이르러 만개했다.
25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선학에 대한 퇴계의 외경심과 사랑을 담은 이 시의 현장은 최초의 사립대학인 소수서원이다.
소수서원의 역사는 1543년(중종 36년)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회헌의 사당을 지으면서 시작됐다. 신라의 대찰 숙수사의 터였다.
당시 이름은 백운동서원. 이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는 명종에게 교육기관으로서 나라의 합법적인 인정을 청했다.
1550년 명종은 친히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을 써서 하사했다. ‘소수’란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소수서원은 ‘학문의 중흥’이란 큰 임무를 띠고 탄생했다. 그리고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나갔다.
조선의 인물 절반은 영남 출신이고, 영남 인물의 절반은 퇴계의 문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서원은 크지 않다.
정문을 들어서면 백운동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는 강의실 강학당이 있고 왼쪽에 문성공묘와 전사청이 자리한다.
그 뒤에는 스승들의 거처인 일신재와 직방재, 우측으로 기숙사인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다. 기타 서재와 선현들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 문 바깥의 휴식처인 경렴정과 취한대 등. 이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건물 배치의 자유스러움과 자연스러움에서 당시 학자들의 기품을 느끼게 된다.
서원 입구에는 숙수사 당간지주(보물 제59호)가 우뚝 서 있다. 유생의 터에 보존돼 있는 불교의 상징에서 당시 학자들의 너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모든 건물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45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아예 자연 속에 포함된 느낌이다. 순흥문화유적지 관리사무소 (054)634-3310
▼다산초당(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의 고향은 한강변이다. 경기 남양주시 능내리(옛이름 마재)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팔당호수의 물이 그의 생가 바로 앞에까지 들어차 있다. 그러나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서 다산의 고향은 멀리 떨어져있다. 땅의 끄트머리에 가까운 전남 강진이다.
그는 신유사옥(1801년)의 여파로 머나먼 강진 땅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등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가 살았던 강진의 다산초당은 엄청난 에너지를 지닌 지식 발전소로서 아직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을 살았다. 목숨만 부지한 채 이 곳에 쫓겨와서는 8년간을 동문 밖 주막에서 지냈다.
그의 곤궁한 모습을 보다 못한 해남 윤씨 일가가 산 기슭에 작은 집을 지어준 후에야 다산은 객방 신세를 면했다. 다산은 이 초당에 들어 “이제야 생각할 겨를을 얻었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다산초당은 만덕산 기슭에 앉아 호수같은 강진만을 내려다보고 있다.
입구에서 초당에 오르는 200여m의 길은 대나무, 향나무, 동백나무의 터널이다. 물들지 않는 상록수여서 숲에 들면 계절을 혼동하기 쉽다. 모두 3동의 건물과 1개의 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정약용의 거처였고, 양쪽의 동암과 서암은 그의 제자들이 머물며 공부를 했던 곳이다.
본채에서 왼편 언덕으로 20m를 오르면 천일각이 있다.
천일각에서의 조망이 장관이다. 발아래 잔잔한 강진만에는 작은 섬 죽도가 드리워져 있고 멀리 부용산과 천태산의 돌봉우리가 구름에 가릴 듯 말 듯 눈에 들어온다.
다산이 흑산도로 귀양간 형 약전과 고향 땅을 그리워했던 곳이다.
다산초당은 이 땅의 차문화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다산은 이웃 백련사의 혜장스님과 사상을 교유하면서 차에 심취했다.
중국에서 들여 온 차가 아닌 우리 차에 매력을 느꼈고 국산차를 예찬하는 ‘동다기(東茶記)’를 쓰기도 했다.
다산은 찻물을 얻기 위해 초당 오른편에 약천이라는 샘을 직접 팠고, 그 물을 끓이기 위해 솔방울을 지필 수 있는 넓적한 돌(다조)을 앞마당으로 옮겨놓았다.
약천에서는 여전히 맑은 물이 솟고, 다조에는 불을 놓았던 흔적이 역력하다.
다산은 1818년 57세의 나이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갔다. 그는 귀향해서 18년을 더 살다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서의 18년간 그는 또 하나의 고향인 강진을 항상 그리워했다고 한다. 천일각에 앉아 그를 그리워해본다. 다산사업소 (061)430-3345
글ㆍ사진 권오현 기자
koh@hk.co.kr
■길에서 띄우는 편지
지난 해 상반기는 가뭄이 심했습니다.
저수지와 강이 바짝 말랐었죠. 그래서 취재의 방향을 ‘물을 찾는 여행’으로 잡았습니다.
가뭄으로 속이 타는 독자들에게 싱그러운 물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도대체 어디에 물이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발 품을 팔아도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습니다. 숲이 건강하고 나무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곳에는 언제나 물이 있었습니다.
긴 가뭄을 비웃듯 콸콸 소리를 내며 흘렀습니다.
올해에는 초봄에만 가뭄이 심했고 요즘에는 비가 심심치 않게 내립니다. 월드컵 때문에 비가 오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미 수중전도 몇 차례 치렀습니다.
지난 주 강원 정선군 가리왕산 계곡에서도 비를 만났습니다. 계곡의 분위기를 한층 띄워주는 고운 비가 아니었습니다.
땅거죽을 송곳으로 찍어내는 듯한 엄청난 호우였습니다. 하늘이 캄캄해지고, 천둥과 번개가 초 단위로 으르렁댔습니다.
다행히 통나무 산막 안에 들어있어서 젖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산막의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습니다.
소나기겠거니 생각했는데 몇 시간동안 내리 쏟아졌습니다. 슬슬 걱정이 됐습니다. 계곡물이 범람하지나 않을까.
계곡 옆의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높은 곳으로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 나갈까말까 망설이는 데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밖으로 나갔습니다. 누런 흙탕물이 무시무시하게 요동치는 계곡을 상상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계곡의 모습은 나그네를 비웃는 듯 했습니다.
물론 물이 조금 불기는 했죠. 그러나 몇 시간 전의 평온을 그대로 담고 즐겁게 흘렀습니다.
자동차가 떠내려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은 완전히 바보 짓이었습니다. 새삼스럽게 다시 느꼈습니다. ‘숲과 나무가 건강하면 모든 것이 건강하다.’
숲과 나무는 국토의 기본입니다. 히딩크의 한국축구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만사 제쳐두고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숲으로 뒤덮인 나라, 그래서 댐을 짓지 않아도 물 걱정이 없는 나라를 꿈꿔 봅니다.
권오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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