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 전 공동개최국 일본이 맥 없이 터키에 무너진 모습을 지켜본 우리 선수들은 자못 긴장하는 듯했다. 세계의 벽이 이토록 높단 말인가.그러나 태극전사들은 일본처럼 선제골을 내준 뒤 석패하는 전철을 결코 밟지 않았다. 우리는 월드컵 3회 우승의 아주리군단을 완벽하게 제압했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애국가가 붉은 열기로 가득찬 대전 월드컵경기장에서 장엄하게 울려 퍼질 때 태극전사들은 오른 손을 심장에 얹은 채 ‘여기서 죽어도 좋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우리 선수들은 정말 죽을 힘을 다한 끝에 승리를 쟁취했다.
휘슬이 울린 지 5분도 안돼 득점 기회가 왔다. 송종국이 프리킥하는 순간 이탈리아 수비수 파누치가 문전에서 설기현의 유니폼을 잡고 늘어졌다. 페널티 킥이 분명했다. 적막이 흘렀다.
그러나 안정환이 골문 왼쪽으로 찬 공은 골키퍼 부폰의 손을 맞고 골라인 밖으로 데굴데굴 흘러나갔다. 아쉬움을 넘은 절망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찬스 뒤에 곧장 위기가 엄습해 왔다. 13분 후 토티가 왼쪽 코너에서 오른발로 코너킥한 볼을 권투선수 출신 비에리가 고개를 수그리며 끊어먹듯이 밀어넣었다.
‘1골로 한국을 누르겠다’고 장담했던 바로 그에게 당한 것이다. 비에리는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4만 관중 앞에서 입에 손을 대고 미친듯이 그라운드를 뛰어다녔다.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강호 답지 않게 단단히 빗장을 내린 채 역공을 노리는 ‘약은’ 축구로 일관했다.
김남일과 김태영이 상대의 손 장난에 얼굴을 다쳤고, 이탈리아 수비수 코코도 머리에 피를 흘렸다. 신경전을 넘어선 혈전이었다.
후반이 되자 히딩크 감독은 이천수 차두리 황선홍를 잇따라 투입하며 저돌적 공격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그러나 위기 때마다 한방씩 날렸던 유상철, 비호처럼 날아들어 슛을 터뜨렸던 꾀돌이 이천수는 결정적 기회를 맞고도 아주리군단의 그물을 흔들지는 못했다. 이대로 무너지는 줄 알았다. 점점 시계를 보는 횟수가 늘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인 법. 신은 한국민의 붉은 소망을 외면하지 않았다. 종료 2분을 남기고 안정환이 문전으로 띄워준 공이 수비수 파누치의 몸에 맞고 흐르자 설기현이 왼발로 땅볼 슛. 심장이 멎는 듯했다. 선수들은 흘린 땀의 대가를 확인했다.
승부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태극전사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차두리는 성난 황소처럼 그라운드를 휘저었고, 홍명보 황선홍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고 후배들을 다독였다.
승리는 우리 것이었다. 연장 후반 12분 페너티킥을 실축했던 안정환이 이대로 무너질 순 없다는 듯 장엄한 마무리로 세계를 뒤흔들었다. 이영표가 오른발로 감아돌려 주는 볼을 세계 최고의 수비수 말디니를 따돌리고 헤딩 슛, 이탈리아의 빗장을 열어 제쳤다.
온 국민이 하나되고, 세계를 숨죽이게 한 순간이었다. ‘AGAIN 1966’. 북한이 이탈리아를 눌렀듯 우리도 로마군단에 한국인의 매운 맛을 보여주었다. 우리 축구가 세계의 벽을 훌쩍 뛰어 넘었다.
이동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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