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최고령 자원 봉사자인 김광찬(金光燦ㆍ72ㆍ서울 송파구 잠실동)씨는 프레스센터에서 일본어 통역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1976년 중령으로 예편한 뒤 86 아시안게임, 88 서울 올림픽에서도 일어 통역 자원 봉사자로 참여했다.그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조그만 힘이나마 사회와 나라를 위해 봉사하겠다”면서 “나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고 말했다. 부인 진정주(秦貞姝ㆍ64)씨와 1남 3녀를 두고 있다.≫
서울 코엑스 월드컵 메인 프레스센터에는 70대의 남녀 자원봉사자가 두 명 있다. 그 중 한 사람은 나이고 한 사람은 김복금(72ㆍ서울 노원구 상계동)씨이다. 지난 5월부터 메인 프레스센터로 출근하기 시작했고, 출근할 때마다 새롭게 각오를 다지면서 각국의 기자들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주위에서 베테랑 자원봉사자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나이의 무게 때문만은 아니리라. 자랑 같지만 내가 보아도 나의 경력은 베테랑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일본어 통·번역을 맡고 있는 나는 86 아시아 경기대회, 88 서울올림픽에도 일본어 통역요원으로 일했다.
일어통역을 하는데 가장 어려운 것은 일본어 사투리이다. 우리나라에도 사투리가 있듯이 일본에도 각 지방마다 사투리가 있기 때문에 그 사투리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수가 많다. 나는 주로 표준어를 구사하는 기자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다른 통역 때보다 어려움이 없는 편이다.
일본에서도 가고시마(鹿兒島)라든지 아오모리(靑森)지방의 말은 제주도 말처럼 방언이 심해 일본 사람들조차도 다른 지방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일제강점기 중국 만주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히로시마(廣島)에서 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일본어를 구사하는 수준이 일본인에 못지않은 편
이다. 일어 통ㆍ번역 자원 봉사하게 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일본인 기자가 예상보다 많이 오지 않아 통역서비스 외에 월드컵 조직 위원회에서 나오는 간단한 공지사항 등을 일본어로 옮기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21세기 첫 국가적 스포츠 행사에 동참하게 돼 한없이 기쁠 뿐만 아니라 특히 서울에서 열리는 큰 게임에 참가할 수 있어 마음이 너무나 뿌듯하다.
나는 스포츠를 무척 좋아한다. 나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해방이 되자 귀국, 경복중ㆍ고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야구부에 들어가 외야수와 2루수로 뛰기도 했고 전국야구대회에 선수로 참가하기도 했다.
덕분에 국제 체육대회에서 여러 차례 자원 봉사 기회를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이번 월드컵대회 봉사활동을 위해 나름대로 축구 상식에 대한 많은 공부를 했다.
자원봉사자로서의 정년 이후 삶은 어쩌면 27년 동안 군대에서 국토방위를 하면서 늘 국가와 사회를 위해 내 한 몸 바쳐야 한다는 사명감이 몸에 밴 탓일지도 모른다.
나는 경복고를 졸업한 뒤 1950년 성균관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는데 그 해 6ㆍ25 전쟁이 터졌다. 그래서 학업을 접고 간부후보생으로 군대에 들어가 무려 27년 동안 군대에서 나의 반 평생을 보내게 됐다. 베트남전이 터졌을 때에는 백마부대 부연대장으로 참전했다. 베트남전쟁이 끝나면서 귀국, 1976년 중령으로 예편했다.
예편한 다음 해인 1977년 나는 쌍용건설에 입사해 1983년까지 건설일꾼으로서 보냈으며, 다른 회사에서 한동안 일하다 1986년 완전히 은퇴를 하게 됐다.
퇴직 후 한동안은 평소 좋아하던 낚시도 즐겨 다니고, 아내와 함께 여행도 다녔다. 그러나 늘 나의 가슴 속에는 놀기보다는 일하고 싶다는 갈망이 컸다. 그러던 차 1986년 아시안게임이 개최됐을 때 일본어 통역 자원봉사자로 나서게 됐다. 그때가 56세. 정년 후 사회를 위해 활약할 기회와 일할 기회가 열렸다는 것은 나에게 무한한 자긍심을 주었다.
72살이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원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큰 기쁨이다. 비록 몸은 늙었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늙을 수 있으랴. 요즘 들어 조금 힘이 부치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욱더 몸을 움직여야 건강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계속 쉬지 않고 무언가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 나와 같은 노인들을 불러 주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 노인들이 활발하게 일하는 그런 사회가 하루 속히 왔으면 하는 작은 희망을 가져본다. 근면·성실을 좌우명으로 삼아 평생을 살아왔던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며 메인 프레스센터와 월드컵 경기장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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