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뜨거울 줄은 몰랐다. 광화문, 대학로는 물론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라면 어느 곳이든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 응원 열기에 지금은 나이도 성별도 세대간 장벽도 사라지고 있다. 그토록 많은 인원이 모이면서도 큰 불상사가 없거니와 응원이 끝난 자리가 깨끗할 정도로 책임감도 막강하다.
허정무 KBS 해설위원에 따르면 길거리 응원은 97년 9월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일본 원정 경기 때 원정 응원을 가지 못한 붉은 악마 응원단이 광화문 일대에서 처음 시도했다.
붉은 악마 응원단은 이름때문에라도 규범을 지켜야 하겠지만 한국인이라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없는 이 ‘붉은 무리’들이 그토록 열광적이면서 성숙한 응원문화를 보여주는 비결은 무엇일까.
■경제에서 비롯된 자신감의 표출
강정원(姜正元) 서울은행장은 “단기간에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자신감의 표출”이라고 표현한다. 우리 국민 모두에겐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는 활화산 같은 에너지와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과시하려는 의미가 있다고.
그러나 강 행장은 우리 축구 대표팀이 세계 일류팀을 만나고 당당히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이 같은 응원 열기도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SK텔레콤 신영철 상무 역시 “이미 우리 IT분야는 세계 정상에 올랐고 우리 국민들은 경제뿐 아니라 문화, 스포츠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일류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다”고 말한다.
■히딩크 정신에 공감
민주당 송영길(宋永吉) 의원은 이 현상이 학연이나 지연에 얽매이지 않고, 원칙을 세워 치밀한 준비를 하는 ‘히딩크 효과’에 공감했던 덕분도 있다고 지적한다.
현대자동차 홍보실 이용훈 상무는 이런 점에서 히딩크 감독의 리더십, 실력에 의한 인재중용과 기초에 충실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직 운영 등이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변화를 촉진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할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여전히 살아있는 공동체 정신
연세대 사회학과 유석춘(柳錫春)교수는 “우리 사회에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아직 우리 사회에 공동체 문화와 공동체 의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것이 입증됐다”고 분석한다.
한나라당 김부겸(金富謙) 의원 역시 “80년대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던 에너지가 월드컵이라는 새로운 지향점을 찾아 분출되는 것”으로 풀이하면서 그 핵심은 “우리 사회에 생생히 살아있는 공동체지향적인 장점을 계속 살려나가도록 사회지도층이 우리 사회의 공동가치나 아젠다를 설정해서 이 열기를 이끌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밝아진 젊은 세대
무엇보다 길거리 응원을 주도한 젊은이들이 달라진 데서 이 현상을 보는 시각이 많다. 배규한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87년 거리를 메웠던 젊은이들과는 표정이 다르다. 당시 그들이 목적의식을 가졌다면 붉은 악마들의 표정은 순수와 열정, 그 자체”라며 거침없이 표현하고, 삶을 순수하게 즐기는 요즘 젊은이들의 모습이 길거리 응원을 통해 표출됐다고 말했다.
과거의 애국심이 적대적 애국심이었다면, 요즘 젊은이들의 애국심은 같은 생활과 문화 취미를 공유하는 ‘생활형 애국심’이라는 것.
■우려의 소리도
김동춘(金東椿) 성공회대 NGO과 교수는 “거리 응원단이 특정 팀이 아니라 국가 대표팀을 응원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마니아도, 진정한 자유주의자도 아니다”라고 단정한다.
국가 공동체가 유일한 공동체로 자리매김해 온 탓에 응원의 행위 역시 이러한 틀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는 것. 그는 정치적 억압은 사라졌지만 기성세대와 학교의 억압 아래 여전히 출구를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출구로서 거리 응원을 보고 있다.
문화평론가 진중권(陳重權)씨는 ‘붉은 악마’가 우리 사회에 잔존하는 ‘붉은 색=좌익’이라는 도식을 깨는 데는 성공했지만, 젊은이들의 이 ‘도발’적인 움직임은 색깔만 요란할 뿐 결코 젊은이들의 도전의식과는 별개라고 분석했다.
“국민들에 의해 고무되는 도발”은 젊은이들의 의식이 너무나 얌전히 길들여지는 상징이라는 것이다. 배교수 역시 월드컵과 동시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의 무관심을 들어 “공동체 의식이 함께 사는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해 시민사회를 활성화할 수 있는 촉매제로서 잘 승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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